[Kingsman/해리에그시] Public Evil 01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공공의 악
Public Evil
* 에그시Eggsy
첫 번째 깜빡임은 생리적인 것이었다. 눈 안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려고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다가 수상쩍은 덜컹거림을 들었다. 양 손이 묶여 있었다.
나는 적어도 최근에는 잘못한 일이 없었으므로 어리둥절했다.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묶여 있는 건 손인데 이상하게 눈가로 압박감이 올라간 것 같았다. 위쪽을 올려다보기가 힘들어서 나는 내 발을 중심으로 바닥을 훑어보았다. 하늘을 따라 깜깜해진 돌바닥에는 찢어진 비닐 조각 같은 작은 쓰레기들이 있었다. 사람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기운이 빠졌다.
까만색 구둣발이 보였다.
나는 보초에게 네 형님이든 뭐든 담당자를 불러오라고 소리를 칠 준비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치와 배짱을 부릴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한다. 보초 같은 졸개는 전자에 속한다. 나는 목구멍을 침으로 한 번 적셨다.
의외로 구둣발이 가까이 다가왔다. 소리를 치려면 어차피 머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위로 얼굴을 들다가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해리 하트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해리.”
그의 표정은 알쏭달쏭했다. 그가 입고 있는 까만색 코트가 칼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밖에 알 수가 없었다. 해리 하트가 칼을 든 게 이렇게 자연스럽다니? 스트랜드 거리의 법조인들이 귀를 후벼댈 소리였다. 그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쥘 수 있는 저울대이다.
해리가 칼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해리는 오른손잡이다.
“길버트 플레이스 26번지에 대해 해리 하트가 뭘 알지?”
“…뭐라고요?”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을 했다.
“해리, 지금 무슨….”
해리가 다가왔다. 내가 볼을 꼬집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바람에 해리가 내 바지를 찢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볼을 꼬집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한 감각이 허벅지에 엄습했다. 나는 아파서 몸을 들썩거렸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따져 물으려고 고개를 홱 쳐들었다. 해리는 아까보다 나와 가까이에 있었고, 나는 이물감 따위는 방해가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해리의 눈은 나를 한 사람의 생명체가 아니라, 검색어를 입력하면 정보를 내뱉는 기계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해리의 얼굴과 키와 목소리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해리 하트는 아닌 남자가 되었다. 나는 칼을 가진 남자가 내 턱을 붙잡았어도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물론 그가 말하는 길버트 플레이스 26번지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그곳은 해리가 최근에 사력을 쏟아 붓고 있는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였다. 경찰에서는 그 지역에서 서른 세 쌍의 서로 다른 DNA를 함유한 핏자국을 발견했다. 해리에 대한 평판을 믿고 그를 찾아왔던 의뢰인의 피도 거기에 있었다. 다만 그 의뢰인은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다른 32명과 구별되었다. 나는 그가 찻잔을 잡은 손을 덜덜 떨면서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변호사님이 아니면 저는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살해당할 거예요. 사실 제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그쪽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그 인간이 시키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변호사님.
해리는 자신의 평판에 걸맞는 실력을 발휘했다. 의뢰인의 그 불분명한 말만 듣고도, 그가 몇 년 간 중앙 경찰국을 비롯하여 각종 사법 기관들이 저돌적인 구애를 던지고 있는 조직에 몸담고 있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길버트 플레이스는 이를테면 조직의 반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하나의 사형장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 형장의 주인은 자신의 대적자와 너무도 닮았다.
일단 나를 잡아 가둔 인간이 해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해리는 내가 화장실에 있어도 자신이 거는 전화는 전화벨이 다섯 번까지 울리기 전에 받는다는 걸 안다. 해리는 나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걸 수상히 여길 것이고, 재빠르게 경찰서에 신고를 했을 것이었다. 로날드 형사님은 날 썩 예뻐하니까 군말 없이 해리를 도와줬을 것이다. 나는 시간을 끌면 되었다.
“그, 그런 건 경찰에 물어보셔야죠. 전 그냥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애라고요.”
나는 준비한 대사를 더 말하지 못했다. 젠장! 성격도 급한 주제에 손버릇도 아주 나빠서, 남자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다리에 칼부터 꽂았다. 저런 인간이 해리와 닮았다는 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김새부터 모든 게 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작자다. 심지어 놈은 칼을 돌려댔다.
“그것보다 더 괜찮은 생각이 있어.”
놈은 코트 주머니에서 내 핸드폰을 꺼냈다. 통증이 너무 커서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문을 꽉 밀어 닫는 동작으로 내 살갗에 칼을 전부 찔러 넣어버린 탓에 내 사고는 정지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에그시?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단다. 어디니?
진짜 해리의 목소리였다. 나는 입을 벌렸고 놈은 웃었다.
“에그시는 나랑 같이 있는데.”
해리는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론 중인 게 분명했다.
—당신은 누구지?
“당신이 찾아올 가치가 있는 사람.”
—에그시는?
“저 정도 상처로는 당장 안 죽어.”
남자는 근처의 한 호텔명을 대면서 해리에게 20분 내에 오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만히 꽂혀 있는 칼은 아까보다 덜 아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해리를 생각했다.
“해리는 건드리지 마요. 내가, 내가 대신 얘기해주면 되잖아. 해리는….”
“아까 내가 한 말은 거짓이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앞으로 10분도 못 버텨.”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칼과 함께 내 몸에 있는 피도 전부 빠져나갈 듯한 모양이었다.
놈은 내가 앉은 자리를 반쯤 돌아서 내 등 뒤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묶여 있었다. 남자는 양쪽에서 줄을 잡더니 맨손으로 내 결박을 풀어버렸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칼이 뽑히지 않은 다리에서 터질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비틀대는 나를 붙잡고 부축을 했다. 그 자세가 기묘하게 다정했다. 앉았다가 일어나니 피가 더 나는 것 같았고 다시 고통이 내 머릿속을 뒤덮으려 했다. 생각이 끊겼다.
나는 놈이 아래로 기우는 내 가슴을 잡았다는 것까지만 기억했다.
⁂
입이 말랐다. 가만히 있어도 입술이 갈라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절로 혀를 내밀어서 입술을 핥았다. 몸이 푹신한 매트리스 속으로 흡수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때서야 내가 있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나는 두꺼운 하얀색 이불을 덮은 채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고 양 손은 베개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손목을 돌려보니 시원스레 움직였다.
어쩌면 해리가 나를 여기까지 옮겨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이불을 치웠다. 솜이 두툼하게 들어있어서 이불은 꽤나 무거웠다. 나는 다리를 바깥으로 내밀다가 칼에 깊숙하게 찔렸던 상처 때문에 더듬거렸다. 피부의 밑바닥이 기분 나쁘게 시렸다.
방문이 열렸다. 역시 해리였다. 그는 친절하게도 피를 많이 흘린 나를 위해 꽉 찬 물컵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해리를 향해 웃으려고 했다.
“일어났네.”
해리는 어미를 다소 이상하게 발음했다. 어쩐지 꼭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갤러해드.”
그가 컵을 건넸다.
“날 자꾸 해리 하트로 착각하고 있잖아. 아무래도 이름을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리가 또 아팠다. 그 고통이 남자의 겉모습에 현혹될 뻔했던 나의 뒷머리를 적절하게 때려주었다. 놈은 나를 소모적인 정보원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나를 찔렀고 아직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그러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데도 물을 마시고 싶지가 않아졌다.
놈은 계속 컵을 내밀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물이 몹시도 시원해보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옅게 웃으면서 물을 한 번 머금고 목젖이 움직이는 걸 보여줬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갔다.
“마셔.”
나는 홱 컵을 뺏어서 한 번에 물을 털어 넣었다. 숨통이 덩달아 트였다.
그는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했다. 그러니 정말이지 해리하고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놈이 가진 모든 곡선과 그림자와 심지어는 이름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이름 아니었던가? 기가 찼다. 아마도 그러한 내 감상들이 표정 위로 떠오른 모양이었다. 놈이 미소를 지었다. 깨끗했고 더 나아가서는 명랑한 웃음이었다.
“얼굴만 씻고 나와. 갈 곳이 있어.”
나는 그의 말을 따라하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침대 밑에 갈아입을 옷이 있다고만 했다.
“왜 내가 당신이랑 같이 갈 곳이 있는 건데?”
놈이 내 전화기로 해리에게 전화를 걸었었다는 게 떠오르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벌떡 일어났을 때 다리가 찌릿할 정도로 당겨왔지만 이번만큼은 머리가 힘을 발휘했다. 해리는 놈이 알려줬던 장소로 갔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해리가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는 사격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해도, 해리에게 온갖 악랄한 범죄에 능해 보이는 인간을 능가하는 속임수와 악력은 없다는 걸 꽤나 확신할 수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당신이 해리를 죽였지?”
그는 또 환하게 웃었다.
“아니.”
“내가 당신 같은 범죄자가 하는 말을 믿을 것 같아?”
“해리 하트는 약 8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건물에 있었어.”
그가 빈 잔을 챙겼다. 놈은 해리보다 쉽게 웃었다.
“일단 씻고 나와.”
침대의 오른쪽 바닥에 정말로 남색 티셔츠와 까만 바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공연히 옷을 노려보면서 발끝으로 티셔츠를 휙 옆으로 치워보았다. 옷은 그냥 옷일 뿐이었다.
다리에 흉흉하게 꿰맨 자국이 있었으므로 샤워는 하지 못했고 놈의 말대로 얼굴에 물만 묻혔다. 내 옷장에서 나온 옷이 아니었는데 셔츠와 바지는 그런대로 나한테 잘 맞았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한껏 연습한 뒤에 방에서 나왔다.
정장의 소매를 당기는 놈의 옆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해리의 사무실에서 무척이나 많이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노트북을 보라면서 손짓을 했다. 진짜 해리가 그 안에 있었다.
방 안에 처음 들어온 해리는 자신과 놀랄 정도로 똑같이 생긴 남자를 보고서 쉽게 문고리를 놓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용기를 냈고 카메라가 설치된 자리와 일직선을 이루는 소파에 앉았다. 아무래도 놈이 모종의 속셈으로 어딘가에 카메라를 숨겨놓은 듯했다.
해리는 침착하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해리가 하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어서 노트북의 볼륨을 몰래 키웠다. 그러나 해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원래부터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거나 추후 음성이 삭제된 건지도 몰랐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해리는 놈과 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라는 걸 영상을 보면서 느꼈고 크게 안도했다. 만약에 놈이 해리의 쌍둥이 형제고 해리가 그를 은밀하게 돕기라도 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었을 것이었다.
놈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고 나는 해리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해리는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강하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곧 방에서 나갔고 영상이 끝났다.
“이젠 나랑 같이 갈 건가?”
해리는 어쩌면 나를 구하기 위해 놈과 어떤 거래를 했나보다. 혹시 나 때문에 그가 의뢰인을 팔아넘길까? 나는 그러한 해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으면서도, 내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당분간 저 오싹한 놈 곁에서 버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놈을 홱 지나쳐서 선수를 쳤다. 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랬더니 놈이 부드럽게 내 손등을 덮으면서 내 손바닥을 돌려 자신의 것에 붙였다. 그가 열쇠를 꽂아 넣고 돌렸다. 나는 고집스럽게 힘을 주고 그로부터 내 손을 돌려받았다.
어차피 이곳에는 다시 올 일이 없을 테니, 굳이 관찰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와서 차를 탈 때까지 한 곳만 보았다. 놈의 뒤통수는 아니었다. 놈을 바라보는 것도 불편했고 나아가서는 그를 갤러해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싫었다.
나는 해리를 생각했다.
해리 하트의 조수들은 이러한 일들을 거쳐야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 게 해리 입장에서도 다행일 것이었다. 내가 있던 집안은 골목의 구석보다 나은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골목에 있었다. 해리를 처음 만난 곳도 하얀 가루가 묻어 있는 비닐팩이 굴러다니던 좁은 길이었다.
깡통을 차고 있다가 그런 구역에서는 보기 드문 비싼 정장을 보았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저 남자의 주머니를 털어야겠다는 속셈을 품었다. 나는 꽤 손이 빨랐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저 남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길 돌아다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 구석이 지저분하고 혼이 쏙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여기에 온 거라면 분명 뚜렷한 목적이 있겠지, 하고 나는 남자의 지갑을 훔치는 일을 단념했다. 대신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에도 내 딴에는 그가 입은 양복이라든가 그가 하는 몸짓이 멋져 보였나보다. 나는 “부잣집 아저씨가 이런 델 들락날락하면 안 돼요.” 따위의 말을 했다.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둥의 사족도 덧붙였던 것 같다. 그랬더니 그 남자, 해리가 하는 말이 이랬다.
“너 같은 아이는 되고?”
나를 ‘골목에 방치해둬서는 안 되는 아이’로 바라봐준 사람은 그 때도 해리 한 명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었다고 빽 쏘아붙이긴 했으나, 내가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에 조금이라도 의아함을 표시해준 그가 고마웠다. 나라고 해서 당연히, 또 언제까지고 그 그늘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해리는 자신이 변호사인데 이 근방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끄나풀로 쓰면 되겠다고 했는데, 그는 영 그 표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대신 해리는 나에게 정보원이라는 더 멋진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골목에서 소매치기 할 상대나 물색하고 있던 나도 그렇게 해리 하트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해리의 사무실에 처음 갔을 때, 해리의 책상이 가장 깨끗하다는 걸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무지 바쁜가 봐요.”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해리의 답변은 꽤나 냉정했다. “빈 수레들이 요란한 법이지.” 그 뒤로 나는 해리가 더욱 맘에 들었다.
책상만 그럴싸하게 어지럽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해리의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이제 해리를 돕는 건 나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중요했다.
차가 멈췄다. 내가 다시금 갇혀있어야 할 장소에 도착했다. 평범한 지붕이 달렸고, 창문은 커튼으로 모두 꼼꼼하게 가린 주택이었는데 주변에 있는 집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 집을 공부 삼아 보던 법정 드라마에서 가끔씩 등장하던 안전가옥이라고 명명했다. 겉으로는 특별할 게 없지만 도시와 떨어진 곳에 홀로 있다는 점에서 그 집은 안전가옥이라 불릴 만했다.
나는 놈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름 돋는 인간과 적어도 하루는 같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놈은 대놓고 날 관찰하겠다는 것처럼 느릿한 움직임을 고수하면서 내 뒤에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피를 잔뜩 흘린 다음 날에 먹은 것이라고는 물 한 잔밖에 없어서 나는 배가 고팠고 목도 말랐다. 나는 당당하게 주방으로 갔다.
“앉아 있어.”
갑자기 놈이 나를 아프지 않게 뒤로 밀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앉아 있으라니까.”
내가 멀뚱히 서서 꼼지락대고 있으니까 놈이 다시 말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척척 소스병이라든가 야채 등을 꺼냈다. 누가 보아도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25분쯤 지나고 나서 놈이 나를 불렀다. 그가 만든 것은 토마토 리조또였다. 근사한 모양의 음식을 보자 입맛이 동했다. 더 자존심을 부렸다가는 해리가 나를 구하러 오기 전에 기력이 다해 쓰러질 것 같아서 나는 리조또를 먹었다. 칼이나 휘두르는 범죄자 주제에 요리 실력이 좋았다. 내가 빠르게 접시를 비워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놈은 중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나는 그가 짧게 답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놈이 외출을 할 일이 생긴 듯했다.
놈이 식탁으로 돌아왔다. 나는 태연하게 숟가락으로 토마토소스를 긁어 먹었다.
“저녁은 같이 먹도록 하지.”
“남들 다리통에 구멍을 내고 나서도 식욕이 도신다면야, 뭐.”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배가 든든해져서 기운이 살아나니까, 아무래도 한 번쯤은 놈을 골려줘야겠다는 치기심이 솟은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표정을 다잡고 숟가락을 빨았다. 놈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새 유리잔을 꺼내서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 일이 내 주된 업무는 아니라서.”
놈은 주스를 와인 따르듯이 잔에 담았다. 유리잔이 보기 좋게 꽉 찼다. 또 이상한 충동이 돌았다.
“그럼 당신이 하는 일이 대체 뭔데?”
“난 인간들을 협력하게 만들지.”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적이 없으면 인간은 서로를 도우려고 하질 않거든.”
역시 그 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놈은 나를 보고 짧게 웃으면서 겉옷을 들었다. 그는 단순히 내 반응이 우스워서 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그는 적어도 말장난을 하지는 않았다. 그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게 다가왔고,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속내를 가다듬으려고 했다. 주스는 차갑고 또 달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