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Full-length

[Kingsman/해리에그시헨리] Frankenstein 06

Jade E. Sauniere 2015. 8. 3. 16:21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with Henry Hart

- Written by. Jade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06. 역사의 부재






  수신과 발신이 모두 활성화된 안경이 헨리 하트 앞에 펼쳐진 풍경을 해리에게도 전해주었다. 관람차와 다리로 대표되는 흔하면서 유명한 런던의 일면이 창문에 걸려 있었다. 


  “일단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물어도 되겠나.”

  —어떤 거?


  해리는 새삼 자신의 복제인간이 터뜨린 사건이 한 두 개가 아님을 새삼 인식했다. 


  “…국회의사당 건부터 들어보지.”


  영상이 오른쪽으로 미약하게 치우쳤다. 


  —내가 새롭게 답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진솔함이 때로는 가장 공포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중앙에 있던 관람차가 양옆으로 흔들거렸다. 해리는 골똘히 자신의 의문을 풀어주고자 하는 헨리의 유아적인 몸짓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귀족들이었잖아요, 해리.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잖아. 몇 백 년 전의 명분을 놓지 못하는 그들 역시 똑같이 미천해. 당신의 세계에 있을 자격이 없을 것들이었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세계는 없다.”

  —아직까지는.

  “난 거짓을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니야, 헨리. 도대체 네가 듣는 내 목소리는 너에게 무엇을 속삭이는 건가?”

  —안 올 거예요, 해리?


  절대적인 이성의 부재가 해리를 짓눌렀다. 해리는 설득을 이어가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네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폭력을 중단한다면 가겠어.”


  즉각적이었던 헨리의 답변이 지체되었다. 영상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아무래도 헨리가 안경을 벗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뭘 준비했는지 가르쳐주지 않아. 24시간 말고, 22시간 안에 집으로 와요. 내가 주는 정보를 소화할 여유를 확보하려면 서둘러야 할 걸.


  테이블에 정렬되어 있는 무기가 언뜻 보이더니 영상이 끊어졌다. 헨리의 말도 중단되었다. 





  록시는 리옹 행 고속열차 표를 끊었고 퍼시벌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을 횡단하고 있는 중이었다. 


  북미 대륙에 단독으로 똑 떨어져 있는 에그시는 미국 본토보다는 멕시코랑 가까운 플로리다 주와 CIA의 본부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를 견뎌낼 마음이 한 톨도 들지 않았다. 에그시는 공항의 티켓 판매대 앞에서 주머니 속의 카드를 굴려대고 있었다. 


  킹스맨들은 전 세계에서 활약한다던 해리의 대사가 머릿속에 섬광을 남겼다. 에그시는 쾌재를 지르며 멀린에게 연락을 넣으려다가 노선을 변경했다. 에그시는 근방의 공중전화를 잡고 간단한 번호를 눌렀다. 


  —고객 센터입니다. 


  에그시는 시시각각 바뀌는 공항의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버지니아 주로 곧장 가는 비행기는 많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 아직도 이 암호 대야 하나? 일단 ‘옥스포드 아닌 브로그’고요. 킹스맨에도 미국 지부 있죠? 그 쪽 사람들한테 CIA 좀 가보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멀린이 사마리아인한테 넘긴 정보를 알아야겠대요. 가급적 빨리요. 아니, 그냥 빨리요. 완전 빨리.”


  에그시에게 최우선적인 존재는 해리 하트였다. 해리를 만나러 가야 하는 사람은 에그시여야 했다. 더군다나 에그시가 받은 임무가 다른 사람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머뭇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별의별 매뉴얼에 통달한 교환원도 이번만큼은 말문이 잘 트이지 않았다. 교환원이 간신히 응답했다. 


  —…접수되었습니다.

  “야호! 고마워요. 멀린한테는 비밀!”


  수화기를 탁 소리가 나게 꽂은 에그시가 티켓 판매대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런던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가 몇 시죠?”





  멀린은 사마리아인의 우편사서함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전 신중하게 입구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는 지의 여부를 검사했다. 감시 카메라의 숫자도 늘어나지 않았고 수상쩍은 전선이 빠져나와 멀린에게 폭탄을 경고하지도 않았다. 


  동일하게 찍어낸 사서함의 보안은 멀린의 관점에서는 무척 취약했다. 멀린은 갈고리가 달린 얇은 막대기와 핀셋의 반쪽처럼 생긴 도구를 꺼내서 열쇠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멀린은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고 갈고리를 살살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달칵 하고 잠금 장치가 풀리는 효과음이 들렸다.


  신기한 것은 단일한 잠금 장치가 적용된 상자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이었다. 멀린이 사서함에 귀를 붙였다. 시한폭탄의 타이머의 째깍거림을 감지한 멀린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헨리 하트가 결심한 이래 런던은 계속 타오르기만 했다. 불꽃이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을 세상과 연결시켜 주던 마지막 통로를 집어 삼켰다.





  피를 닦아낸 헨리의 손은 건조했다. 그는 공기보다 메마른 자신의 손등 위 격자무늬 같기도 하고 아주 작은 마름모들이 프랙탈 도형을 형성하는 것 같기도 한 실선의 흔적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헨리는 무심히 손가락의 끄트머리로 손등의 피부를 밀었다. 습기를 머금지 못한 틈새들이 말끔하게 드러났다가 규칙을 모방할 뿐인 혼란스러움 아래로 가라앉았다. 헨리는 그 행위를 네 번 반복했다. 그 횟수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헨리는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복제인간이 호흡을 하고 심장을 가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납작해진 바이탈 사인의 단일음보다 더 오싹할 수도 있는 소리였다. 헨리는 거기서도 어떤 종류의 무의미함을 발굴해냈다. 빛나는 것은 흘러가는 이 시간뿐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다 흐르면 그가 해리를 되찾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버린 헨리의 동공이 급속도로 커졌다가 느릿하게 평온해졌다. 해리 하트는 그가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반짝거림을 박탈할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헨리는 진공의 어둠 속으로 휘말리게 될 것이었다. 그 안에 가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헨리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걷듯이 무한한 살육을 자행할 것임을 직감했다. 기사는 본디 자신의 이상을 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게 맞았다.


  헨리가 가지런히 벗어둔 손목시계를 똑바로 세웠다. 그 물건의 주인은 본래 해리 하트였다. 그는 손목시계 말고도 참 많은 것을 가진 이였으며, 무엇보다도 헨리를 보듬어줄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인간을 흉내 낸 안구에 비친 시곗바늘이 오른쪽으로 쳐졌다. 진정한 인간의 눈동자에 비친 것도 그러했다.


  해리 하트는 일생에서 가장 진지하게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복제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변수였다. 그의 언행으로 미루어보건대 헨리 하트는 해리의 미성숙하고 치기 어린 부분만을 긁어모아 합성된 것 같았다. 그는 다분히 해리에게 의존하는 자였고, 한편으로 해리는 자신이 헨리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게 가능한지 장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유래도 기원도 없었으며 그것이 해리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심었다. 


  최악의 경우 헨리의 죽음이 해리의 최후와 같을 수도 있었다. 상호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것임을 해리는 처음 깨달았다. 


  소리라는 것이 증발한 듯한 킹스맨 본부에서 해리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심장 박동이었다. 그것은 작고 균일해서 마치 백색 소음처럼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는 역설적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반면 헨리 하트의 박동은 그 자신조차 자극할 청각적 고통이었다.


  해리는 황급히 사고의 흐름을 부여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당겼다. 그의 이성이 유사인간의 태생적 가녀림에서 옮겨가 해리 하트의 죽음에 몰두했다. 


  시곗바늘이 끝없이 오른쪽으로 침몰했다. 





  시간의 경과가 킹스맨 본부로 가져다준 소식들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 연방정보국은 단 한 차례도 사마리아인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퍼시벌은 전해왔다. 대의라는 꼬리표를 단 무언가를 등에 업고 생명을 처단하는 행동은 독일인들이 한마음으로 치를 떠는 유형이었다. 


  프랑스 리옹에 있는 인터폴 헤드쿼터를 방문한 록시에 따르면, 국제경찰 집단은 바르셀로나에서 반정부 집단이 대대적인 궐기를 일으킬 거라는 정보를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에게 넘긴 전과가 있었다. 


  우편사서함과 함께 잿더미가 될 뻔한 위기를 면한 멀린은 다른 요원들보다 늦어질 거라고 언질을 주었다. 멀린 대신 정보들을 취합 중인 해리는 지금까지 잠잠한 에그시가 걱정이 되었다. 해리는 여섯 번쯤 에그시에게 통신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 때 바다를 건너 런던에 도달한 전파가 나타났다.


  —미국 지사의 프랭클린입니다. 그쪽에서 요청한 자료를 전송하고 있으니 다 끝나면 한 번 확인해보시죠.


  해리가 어리둥절해했다. 


  “여기서 요청을 했다고요?”  

  —예. 1분만 지나면 됩니다. 그럼.


  프랭클린 요원과의 대화는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해리는 용건만 전달하고 쏙 사라져버린 미국인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 해리는 에그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네트워크 접속 작업에 투입되려던 그의 집중력이 하이퍼루프가 멈춰 서는 마찰음의 방해를 받았다. 해리는 본능적으로 책상 위에 있던 가장 뾰족한 물건을 쥐면서 등을 돌렸다. 


  발렌타인의 총을 맞은 이후로는 전혀 그립게 여겨본 적 없던 파란색 양복을 입은 청년의 모습은 한순간에 해리의 가슴에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에그시.”


  해리는 말도 없이 해리 앞으로 걸어와서는 그를 안았다. 에그시의 이마가 해리의 어깨와 맞닿았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해리는 자신의 존재를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느끼고 있는 에그시의 진실하고 어린 몸을 다독였다. 에그시는 해리의 옷이 젖기 직전에 그에게서 물러났다. 


  “해리 말대로 꼼짝 않고 있으려고 했는데 바쁜 일이 많아서 그럴 수가 있어야죠. 이해해 주실 거죠?”


  재치 있게 휘는 에그시의 눈꼬리가 반짝거렸다.  


  “그 정도야, 물론이다.”


  에그시의 빛은 적어도 해리를 위로하고자 가장된 것이 아니었다. 왜곡된 측면 없이 반질거리는 에그시의 모든 구석에 해리는 잔잔한 웃음을 띨 수밖엔 없었다.   


  “제가 올 때까지 해리가 있어줘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해리가 그 복제인간한테 갔을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해리가 자신의 속셈을 들키고도 평정심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몇 십 년간 갈고 닦은 포커페이스 덕택이었다. 해리는 헛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변명을 지어내지도 못했다.   


  “제가 정곡을 찔렀죠, 그렇죠?”


  해리는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그 사이에 많이 영리해졌구나.”


  에그시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씁쓸한 미소가 다 걷히지 않아 에그시의 제스처에서는 장난기가 조금 깎여나갔다. 


  “정 해리가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면, 같이 가요.”

  “에그시, 그건….”

  “전처럼 혼자서 멍청하게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같이 가자고요. 무조건이에요.”


  에그시는 구조적으로 정해져 있는 시곗바늘의 까딱거림보다도 굳건했다. 해리는 에그시가 간접적으로 언급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다섯 시간의 여유가 남은 시점이 되어서야 킹스맨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양식으로 해리 하트의 귀환을 반가워했다가, 해리의 계획에 반대하고야 말겠다는 통합된 피켓을 들었다. 해리는 별수 없이 자신의 복제인간에 관한 특강을 열어야 했다.  


  “대명사를 남발하면 자네들이 헷갈릴 테니 처음부터 밝혀두겠네. 헨리는….”

  “복제한테 이름을 지어줬어요?!”


  에그시가 펄쩍 뛰었다. 해리는 유사인간에게 인큐베이터 번호가 아니라 이름이 있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니란다. 계속 해도 되겠니.”


  에그시는 발끈했던 속도만큼 신속하게 얌전해졌다. 


  “많은 점이 나와 일치하네. 단적으로 내가 습득한 모든 기술들은 그도 다룰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기억의 양도 비등한 것 같아. 그에게 없는 것은 그것들의 결실이지.”


  “결실이요?”


  “그의 현재 사고방식은 나의 과거일세. 그의 말대로 억눌려 있던 내 본심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심하게 뒤엉킨 내 과거의 단편이야.”


  해리의 어투는 꼭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는 듯했다. 


  “헨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내 이상향을 건국해주는 과정의 일부라고 확신하고 있네. 실패작이면서 쓸모없는 가지들을 자신이 손수 쳐내주겠다는 거지. 그는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있다고 했어. 그에게 약간이라도 평화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네.”


  진중한 자세로 해리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퍼시벌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우리라고 굳이 평화적인 방법을 지켜야 하나? 왜 그를 없애버리는 선택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 건가. 나 혼자라면 승산이 없어도, 이 인원이 다 덤비면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해리도 같이 죽게 되면?”


  해리보다 입을 빠르게 놀린 쪽은 멀린이었다. 신화 속에서도 일당백 역할을 해내던 마법사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영리했다. 


  “기억도 행동양식도 해리와 똑같다면 그에겐 해리조차 모르는 어떤 접점이 있을 지도 모르네. 해리와 그 헨리라는 자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면, 복제인간을 죽이는 순간 해리도 죽게 될 수 있어.”


  퍼시벌의 눈썹 사이가 쓱 좁아졌다. 멀린이 말을 이었다.


  “MI6에 다녀왔더니 그쪽에서는 사마리아인에게 어떤 정보를 보내면 이득일지 계산을 하느라 아직 그에게 아무 것도 준 적이 없다는군. 결국 우리가 사마리아인과 함께 아는 건 바르셀로나뿐이야. ‘동시다발적’이라고 했으니 하나 이상의 테러가 발생할 텐데 우리에겐 마땅한 후보군조차 없지. 우리가 귀한 시간을 써가면서 얻은 소득이 상상 외로 미비한 만큼 달리 여지가 없네, 퍼시벌.”


  퍼시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로 해리를 응시했다. 자신의 계획안을 소개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해리가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헨리, 어디서 만나면 좋겠나?”


  해리의 주변으로 에그시와 퍼시벌 등이 둥글게 집합했다. 숫자와 달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무력하게 하루가 다 지나갔음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모니터는 분명코 헨리 하트의 안경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보이는 화면은 꺼진 듯이 까맸다.  


  —웨스트민스터 궁전. 당신이 아끼는 그 남자애도 같이. 50분 뒤에.


  매끈했던 에그시의 표정이 울퉁불퉁해졌다.


  “…에그시 말인가?”

  —그와 볼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은 데려오지 마요. 죽일 거야. 


  헨리 하트의 입술에서 죽음은 너무도 쉽게 튀어나왔다. 해리는 몇 초 만에 침착한 답안을 끄집어냈다. 


  “알겠네.”

  —부서진 쪽으로 와요.


  짧게 대화를 마친 해리가 마이크를 제 자리로 밀었다. 멀린이 의자를 돌려 에그시를 보았다. 에그시는 의외로 태연했다.


  “어차피 따라가려고 했는데요, 뭘.”


  록시가 검고 길쭉한 가방을 멘 채 머리를 내밀었다. 가장 돋보이는 장비를 갖춘 그녀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저격수였다. 


  저마다 다른 임무를 띤 킹스맨들이 흩어졌다.


  날짜가 바뀌었다.


  헨리 하트는 노란색 테이프가 둘러진 곳 안쪽에서 파괴된 건축물의 잔해를 의자 삼아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강변과 가까워 다소 차가운 바람이 그의 셔츠며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붙잡고 흔들었다. 아무도 갖지 못한 흉터와 육체가 조용히 꿈틀거렸다.


  가파른 각도를 견뎌가면서 궁전의 성곽에 올라간 록시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녀가 차근차근 삼각대를 펼치고 소총을 조립했다. 바람이 심할 것이라는 멀린의 조언에 후드를 뒤집어썼음에도 한 가닥으로 묶인 그녀의 머리카락은 옷감 뒤에서 요동을 쳤다. 록시가 스코프에 오른쪽 눈을 가져가 댔다. 


  “어, 으음… 자리 잡았어요. 헨리 하트가 보입니다.”


  록시는 망설이다가 헨리 하트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는 재앙의 중심에서 사색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록시가 심호흡을 하고서는 저격용 소총과 상체를 바짝 붙였다.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려앉은 유사인간의 속눈썹이 강변의 차디찬 온도에 식어갔다. 전문적인 섬세함도 없이 빚어진 검은 가닥들은 눈 깜짝할 새에 얼어붙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헨리 하트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극적으로 헨리가 눈을 떴을 때 해리의 실루엣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는 헨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로 칼라가 달린 평범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외양이었다. 해리가 곁에 없는 헨리와 같이 얄팍하게 살아있던 피스톨이 삽시간에 기운을 회복했다. 


  해리는 그가 애정해서는 안 될 형편없는 청년을 옆에 끼고 있었다. 헨리는 적당히 거리가 좁혀지길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무기들 내놔. 미안하지만 해리도.”


  해리는 양 손바닥을 펼쳤다. 자신은 비무장이라는 의미였다. 에그시는 허리에서 총 두 자루를 뽑더니 헨리의 발끝을 향하여 세게 밀었다. 헨리가 강박적인 정확도로 총을 쏴서 에그시가 넘긴 피스톨들의 방아쇠를 날려버렸다. 


  “내가 왔으니 자네가 꾸몄던 그 동시다발적인 폭력 사태는 중단시켜줬으면 좋겠네.”


  헨리는 다시 정지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서 해리는 헨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헨리?”

  “당신을 본 순간 멀린한테 자료 넘겼어요. 걱정하지 마요.”


  실제로 헨리의 가슴에 달린 셔츠 주머니에는 안경이 들어 있었다. 에그시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헨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환경에서도 헨리 하트는 해리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의 에그시를 죽이면 당신은 많이 슬퍼할 거예요, 그렇지? 당신이 그에게 품고 있는 애정은 내 머릿속에도 뚜렷하게 박혀 있거든. 그런데 그는 실상 당신의 절망적인 눈총을 받아야 하는 종류잖아. 모순이야, 해리. 당신의 고결함과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거지.”


  헨리는 부서진 철근 덩어리를 장식하는 자극적이면서 현대적인 조각상이 부조리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꽉 다물린 채 메마른 단어들이 무너진 궁전의 터에 던져졌다.  


  “훌륭한 왕의 자질을 흐리게 만드는 족속들은 문학과 현실 모두에서 존재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사라져버려야 해.”


  헨리가 자신의 상체와 들고 있던 총을 한꺼번에 곧추세웠다. 헨리는 에그시를 겨누었다. 해리를 조심스레 뒤따르고 있던 에그시가 굳었다. 헨리는 에그시가 입은 옷이 킹스맨들의 슈트라는 걸 눈치 채고 그의 이마를 노리고 있었다.


  해리는 놀랍게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자네에게 부재하고 있는 걸 알려주겠네.”


  헨리의 동공이 이채를 띠었다. 


  “…부재?”

  “그래. 자네에게 없는 것. 결핍된 거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말해줘.”

  “자네에겐 이성적 사고력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가 없는 거였어.”


  에그시는 자신이 더 발을 떼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단코 에그시가 비집을 수 없는 두 관계에 대한 신비로운 해석의 막이 열렸다. 


  “자네는 피상적인 젊음과 여물지 않은 철학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나의 옛날 초상과 같아. 자네의 주장을 듣고 자네의 행실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것들이 헨리, 자네의 경솔함이 아니라 내가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부스러기들에서 탄생했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만 했네.”


  헨리는 보는 이가 간담이 서늘해지는 집중도를 발휘하면서 해리의 언어를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서 문제는 끝나지 않았지. 정작 나는 그로부터 자유로워진 논리적인 비약으로부터 자네는 왜 묶여있는 건지, 그걸 알아야 했으니까. 자네는 내 과거를 위험한 수준으로 맹신했어.”


  헨리와 해리는 시나브로 밀접해지고 있었다. 에그시는 한 발자국 정도 해리의 뒤에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총구는 악착같이 에그시의 이마에 따라붙었다. 


  “나는 거기서부터 태어났어, 해리.”


  해리는 헨리의 말을 받아들였다.


  “나도 뒤늦게나마 그걸 깨달았네. 헨리, 자네는 태어난 그 순간 이후의 시간을 갖지 못했어. 자네에겐 내 과거뿐이야.”


  방탄 양복도 입지 않고, 그 어떤 최첨단 무기도 소지하지 않은 맨몸의 해리 하트가 자신의 절반에게 두 번째로 제안했다.


  “내가 자네와 나의 완전한 역사를 나눌 수 있게 해주게.”


  해리의 손은 헨리가 앉은 상태에서는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일어섰다. 


  “난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은 내 전부니까.”

  “그런 짐은 더 이상 짊어지지 않아도 돼.”


  궁전의 지붕에 올라가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록시도, 라이베리아와 이라크에서 초래될 뻔한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본부의 멀린과 퍼시벌도 두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그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해리가 이 담화의 평화적인 종결을 고했다. 


  “자네를 착각으로부터 꺼내주겠네.”


  헨리가 멈칫했다. 인간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올 듯했던 헨리의 눈동자는 조악한 안구로 후퇴했다. 해리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헨리의 시야에 비친 자신은 추억과 사랑에 젖은 주인이었지, 헨리 하트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해리가 옆으로 돌았다. 그의 시선 밖에서 헨리는 피스톨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에그시는 찰나보다 더 짧은 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그시는 한 발 늦게 그 결과를 목격했다. 


  해리에게 밀쳐진 에그시가 비틀댔다. 그의 오른편으로 턱없이 얇은 상의만 걸쳤을 뿐인 해리의 피부가 탄환에 찢겨지고 있었다. 에그시는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헨리의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