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Saint and Sinner 10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성자와 죄인Saint and Sinner
Chapter 5. 죄인의 미래A Future of a Sinner
디케이의 스나이퍼를 심문하면서 제퍼슨이 챙긴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나이퍼는 특정 분야에 관심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버니지아 출신의 청부업자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스나이퍼의 단골 고객이 중대 규모쯤 되는 범죄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저격수가 언급된 모든 자료들을 긁어모았다. 해리 하트를 탐낼 만큼 안목이 높은 에드윈 디케이가 선택한 인물 치고는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케이라면 제퍼슨도 코드네임을 아는 세계적인 재주꾼들을 고용할 수 있었으리라.
끈질긴 조사 끝에 제퍼슨은 문제의 스나이퍼를 애용하는 집단이 오래 전부터 디케이의 차명계좌로 지원금을 받고 있던 사실을 알아냈다. 디케이의 다른 이름은 신흥 범죄 조직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에드윈 디케이는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고 오로지 계좌에 찍히는 액수로만 그들의 범죄를 돕는 하나의 검은 천사였다.
제퍼슨은 그런 조각들을 모아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창조해냈다. 에드윈 디케이는 어쩌면 발렌타인보다도 강제적 인구 감축을 먼저 신봉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제퍼슨은 발렌타인이 온갖 수단을 먼저 건드려본 뒤에 폭력을 이용한 인구 감축으로 선회했다면, 에드윈 디케이는 애초부터 살인은 필요악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멀린에게 쭉 풀어놓았다. 디케이가 하필 바이오테크놀로지 산업에 뛰어든 것에도 그러한 꿍꿍이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종국에 멀린은 제퍼슨의 가설을 믿고 말았다.
“자네 말대로라면 디케이는 그야말로 구제가 불가능한 고약한 말종이로군. 이젠 그런 놈에게 붙잡힌 갤러해드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설명해줄 차례겠지?”
“나는 아주 고전적인 전술을 따라가는 걸 제안하려고 하네.”
“고전적 전술?”
“가장 질 나쁜 놈에게 초점을 맞추자는 거지.”
멀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갤러해드를 에드윈 디케이를 묶어놓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로 내세워서 그의 죗값에 대한 협상을 이끌어내자는 거로군?”
제퍼슨이 소리가 나지 않게 손가락을 튕겼다. 패널이 뒤집어지면서 제퍼슨의 추가 계획이 윤곽을 드러냈다.
해리의 소행이 명백한 켄터키 교회 살인사건부터 브루클린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해리가 독립적이고 온전한 사고를 할 수 없다는 증거들은 차고 넘쳤다. 그렇다면 일단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었고 그 아래의 형량은 충분히 조율할 수 있다고 제퍼슨은 생각했다. 여차하면 해리가 갤러해드로서 세운 업적을 무기처럼 들이밀 수도 있었다.
“사실 그 펜타곤 일만 하더라도 놀라워서 뒤로 넘어갈 사람들이 많아. 갤러해드가 없었으면 미국 국방성이 점령당했을 테니까.”
제퍼슨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 기상천외했던 작전의 일원이었던 멀린은 제퍼슨의 미소를 이해했다.
“자네 생각을 따르도록 하겠네. 뛰어난 협상단이 필요하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멀린은 사실 미국 주요 지도층들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와 배경을 모두 쥔 적임자를 알고 있었다.
⁂
에그시는 거의 소파에 드러누운 자세로 맞은편에 올곧게 앉아 있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에그시가 고개를 장난스럽게 까딱거렸다.
“24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면, 잠도 해리네 집에서 자는 거예요?”
“내키지 않나?”
“그럴 리가요. 이게 어떤 기횐데.”
에그시는 아예 쿠션과 뒷머리를 맞댔다. 그는 소파 위에서 최대한 몸을 뒹굴거리며 현재의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해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제 파일 읽으셨댔죠? 그럼 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시는 게 없겠네. 전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파일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단다.”
그러자 에그시가 혀를 내밀었다.
“어쨌든 제가 훨씬 뒤처지는 입장이라는 건 맞잖아요. 해리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돼요? 예를 들자면… 해리가 킹스맨이 된 계기는 어때요?”
슬쩍 졸음기가 차는 것 같던 에그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에그시는 옆으로 누운 채 우아하고 비밀스러운 기사를 끈질기게 흔들어댔는데, 해리는 의외로 난처해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책이 싫었기 때문이었지.”
“에?”
“청소년 미만인 귀족의 생활은 정말로 따분하단다, 에그시. 연회장에 나갈 수도 없고 승마나 크리켓 같은 운동을 즐기기엔 몸이 다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 나이에 배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나와 맞지가 않더구나.”
해리의 어투가 그 자신이 과거를 평가할 때 빼먹지 않는 단조로움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았던 게 독서였다. 영어를 더듬더듬 배워가던 처지에 말로우나 밀턴을 뒤적거렸지.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놀랍단다. 물론 책에는 문학만 있는 건 아니지. 역사나 미학, 사회학도 흥미로웠고 정치학도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 난잡한 독서를 하다 보니 난 그만 지치고 말았다.”
“너무 어려워서요?”
“그 다양한 간접 경험들이 나에게 주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씩 웃으면서 해리가 독서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대보았던 에그시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말이 너무 어려워요, 해리.”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책들이 내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것들만을 논했다는 뜻이란다. 나는 지혜로운 철학자가 될 마음도 없었고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가 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질 않더구나. 나는 생명력 있는 무언가를 원했어. 내가 진실하고 절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감 있게 해석할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내 자신을 정립해갈 수 있도록 날 도와줄 만한 무언가를 말이야.”
“책 싫어하시는 분 치고는 소설가들의 명언을 잘 알고 계시던데요.”
“그게 바로 철이 든다는 거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온 몸으로 내 행동과 성취가 쓸모 있다는 증거를 느낄 수 있는 게 더 좋았거든.”
에그시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저처럼요?”
해리는 곧장 입을 열지 않았다. 에그시는 공연히 부끄러워져 경솔한 수다쟁이처럼 굴었다.
“아니, 이건 좀 호들갑인가요? 아직 정식 킹스맨이 된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않다, 에그시.”
빈틈없이 꼰 다리에 올라간 두 손이 구성하고 있는 해리의 자태에는 변동이 없었다. 에그시는 어쩐지 그것이 고마웠다. 해리 하트는 가감 없이 자신의 과거를 서술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그시에게 말해주었다.
“너는 이미 훌륭해. 그리고 그것에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게 기쁘단다.”
해리는 꼭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소화할 여유를 주듯이 침묵했다. 에그시도 그의 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해리가 에그시에게 일어나라며 손짓했다.
“중요한 날을 앞두고 있는 후보생을 소파 위에서 재우지는 않을 테니 따라와. 네가 쓸 침상을 마련해뒀으니.”
에그시가 주황색 등을 지나 해리를 쫓아갔다. 등불의 빛깔이 아직 에그시의 양 뺨에 남아 있었다.
에그시가 눈을 깜빡였다. 눈을 떴을 때와 감았을 때 보이는 명암이 똑같았다. 손가락으로 엮으면 따뜻함이 전해질 듯한 주황색 빛과 자신을 편안한 자리로 안내하는 해리의 손은 그의 현실이 아니었다. 해리 하트는 에그시가 어울리지도 않은 계산을 하느라 디케이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에그시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그런다고 현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서, 에그시는 그 뒤로 해리 하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팍 죽어버린 피부를 덮어쓴 엔지니어들이 한동안 에드윈의 펜트하우스를 들락거렸다. 눈두덩에 커피를 다섯 잔씩 끼얹은 것 같은 거무튀튀한 얼굴들이 늘어갈수록 에드윈의 기계는 진화를 거듭했다. 보관실의 반을 채우던 기계 장치의 크기도 뒤따라 줄어 들어갔다.
이스트 빌리지의 아파트에서는 오늘도 록시가 신문 기사를 오리고 있었다. 디케이를 감시하라는 멀린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에그시가 뜻하지 않게 에드윈의 펜트하우스에서 실종된 전직 사법기관 요원을 포착한 이후부터 시작된 록시의 일과 중 하나였다. 록시는 새로 산 화이트보드에 차곡차곡 신문지 조각을 붙였다.
에그시는 내용물 하나 바꾸지 않은 백팩을 매고 밤마다 한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 저격소총에 끼우는 스코프를 들고 그는 펜트하우스의 창문을 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주로 거실을 돌아다니는 건 에드윈 디케이였다. 어쩌다가 실종자들의 얼굴이 보이면 에그시는 재빨리 준비한 사진을 펼쳐놓고 체크를 했다.
해리 하트는 무척이나 드물게 에그시의 렌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해리는 가끔씩 빈 물잔을 채우러 방에서 나오곤 했다. 에그시는 해리와 에드윈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끔 해리의 방으로 들어가는 에드윈 디케이의 측면에 스코프를 내리고 주먹을 말아 쥘 뿐이었다. 에그시와 해리 가운데를 점유한 거리와 깊이가 너무나 가혹했다.
한편 실제적으로는 에그시와 가장 동떨어져 있는 제퍼슨은 그에게 익숙한 애비뉴를 종단하고 있었다. 그는 건물 생김새처럼 우직한 입구를 거쳐서 약속된 출입증을 받았다. 방문자로 분류된 출입증에도 그의 이름은 제퍼슨이라고 써져 있었다.
리듬감 있게 이어지던 제퍼슨의 움직임이 척 봐도 안쪽이 널찍할 듯한 방문 앞에서 멎었다. 문이 열렸다.
“패트릭, 오랜만이로군.”
커다란 FBI 마크를 등지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제퍼슨을 맞이했다.
“윌리엄.”
“잘 지내나? 자네가 이렇게 촉박하게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 혹시 큰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걱정일세.”
2년째 미국의 연방수사국을 감독하고 있는 윌리엄이라는 남성은 유연하게 제퍼슨이 본론을 꺼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았다. 당연히 제퍼슨은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큰일이 하나 있긴 합니다.”
“내가 거들 거라도 있나?”
“사우스 글레이드 교회 사건과 브루클린에서의 마피아 학살, 그리고 베이커 요원을 살해한 범인을 알고 있는데 보다 확실한 처리를 위하여 국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윌리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돕겠네, 패트릭. 뭘 원하나?”
“그 범인에게 사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죗값을 치룰 수 있는 여지를 주십시오.”
국장의 안면근육이 불균형한 형태로 딱딱해졌다. 사실 제퍼슨은 착석하는 그 순간부터 건조한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방금 자네의 말이 실수였기를 바라네.”
“안타깝지만 아닙니다.”
“만일 자네가 언급한 세 사건이 모두 동일범의 짓이라면 그 자식은 전기의자에 앉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최악의 살인마야!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딴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이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하세.”
“진정한 대화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국장님.”
제퍼슨이 내용물이 워낙 두꺼워 표지가 떨어져 나갈 듯한 파일들을 차근차근 꺼냈다. 국장의 오른쪽 눈썹이 움찔했다.
“국장님께 제가 약간의 융통성을 불어넣어드리려 하는데요. 어떠십니까?”
패트릭 제퍼슨이 자신감 있게 서류를 두드렸다.
⁂
맨발이 매끄러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가구 하나가 옷걸이를 대신에 젖은 수건을 받아들자마자 곱슬거리는 머리칼엔 이슬이 맺혔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는 머리카락에서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해리 하트는 침대 위에 미리 갖춰진 드레스 셔츠를 걸쳤다. 빳빳한 옷감이 팔락이면서 그의 팔에 휘감김과 동시에 두 번째 물방울이 방바닥 위에 남았다.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균열을 암시하고 있었다.
바지를 입으려던 해리는 발가락 끝에 닿는 얇은 이물질을 발견하고 몸을 숙였다. 침대를 방패삼아 숨어 있던 그것은 좁은 공간에 온갖 내용들을 구겨 넣은 쪽지였다. 해리가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사각형은 주변의 꼬리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글씨를 선으로 지운 흔적들과 펜이 번진 자국은 모두 해리의 필체가 빚은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뜯어봐도 자신이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했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쪽지를 까딱거렸다. 사각형을 다 채우지 못한 점과 선들이 해리의 시신경 위에서 헤엄쳤다.
그건 아마 키패드의 회로를 추정한 그림일 것이었다.
해리는 자신이 빚어낸 생각에 놀랐다. 최근에 그는 키패드 같은 정밀한 물건보다는 투박한 총기와 더 밀접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머릿속에 그의 추정에 정당성을 입혀 보려는 시도가 솟아올랐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해리 하트의 인식은 본래 화약이 줄 수 있는 폭력적 쾌락이 아니라, 더 지적이고 복합적인 의의를 가진 목적과 더 오랜 역사를 공유했을 지도 몰랐다.
해리가 셔츠의 단추를 꿰었다. 그가 들고 있던 쪽지는 침대 밑으로 돌아갔다.
⁂
[FBI 국장 설득 완료.]
제퍼슨의 호기로운 전갈을 받았을 무렵만 해도 멀린은 제퍼슨이 맡은 영역은 염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예로운 성을 코드네임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이 킹스맨의 저력이 그의 외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 멀린도 감탄할 만한 결과가 도출되곤 했다. 멀린은 제퍼슨이 오늘 밤에는 득의양양하게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어림잡았다.
타이밍 좋게 전화벨이 울렸다. 멀린이 수화기를 가볍게 낚았다.
“제퍼슨, 어떻게 됐나?”
—법무부에서 막혔어. 에드윈 디케이를 심문할 수 있게 해준다면 고려해 본다고 하더군.
“…오.”
—그래서 다음에는 우회로를 통해 진입하려고 해.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고. 가망이 없는 것 같으면 제 3의 방안을 모색해야겠지.
멀린이 씁쓸하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알겠네.”
—그, 갤러해드의 청년이 버텨줄 수 있을까?
멀린은 대답을 늦추고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에그시가 옥상에서 바람을 맞고 있을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