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Saint and Sinner 09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성자와 죄인Saint and Sinner
Chapter 4. 성자의 과거A Past of a Saint
꺼진 상점들의 개수가 늘어나고 대형 빌딩들에서 아파트와 주택으로 불빛들이 옮겨가는 시간이었다. 스파이들이 낮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날개가 비상할 적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내일 봅시다.
록시의 핸드폰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멀린이 작전 개시를 알렸다.
“가, 에그시.”
디케이 코퍼레이션의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대기 중이던 에그시가 팔을 빙빙 돌렸다. 그가 힘껏 줄을 던졌다.
짙은 밤하늘에 녹아든 로프는 어떤 잔영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 디케이 코퍼레이션의 옥상 울타리까지 날아갔다. 로프의 꼬리 부분에 달린 갈고리가 옥상의 안전 펜스 사이에 턱 걸렸다.
—사무실에서 나왔어요. 아래층부터 심층 수색 시작하겠습니다. 에그시, 잘 해.
통신기 너머에서 록시가 말했다. 에그시는 시험 삼아 로프를 두어 번 당겨보면서 대꾸했다.
“문제없다고.”
에그시가 한 발을 옥상 펜스에 올려놓았다. 그보다 더 안전한 부분을 딛고 있던 발을 힘차게 뒤로 밀면서 에그시는 공중에 떠올랐다. 밧줄 하나에 몸을 의탁하여 위기일발의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의 생김새 그대로 에그시가 주르륵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밤하늘의 협조 덕택에 행인들은 다리를 퍼덕거리면서 공중 비행을 하는 청년을 놓치고 지나갔다.
에그시가 리듬감 있게 디케이 코퍼레이션의 본사 옥상에 착륙했다.
“무사히 착지했어요, 멀린.”
—이제부터 더 조심해야 해. 에드윈 디케이는 출입증이 따로 필요 없는 인물이라 건물 밖으로 확실히 나갔는지 아닌지 체크가 안 되고 있다. 복도 카메라 영상에서도 보이지 않는군. 그 자가 안에 있을 지도 몰라.
“알고 있어요.”
에그시가 환풍구 아래쪽에 앉아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D자 고리에 연결된 질긴 로프들과 서스펜더를 비롯한 낙하 안전 장비들이 우수수 끌려나왔다. 에그시가 멜빵을 멨다.
—란슬롯, 그 쪽은 어떤가?
—별 이상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청사진 대로에요. 수상해 보이는 시설이나 새로 생긴 방은 없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디케이 코퍼레이션도 차차 어둠에 잠겨갔고, 그만큼 양 방향에서 건물을 조사하는 두 명의 킹스맨 요원들의 움직임은 활발해졌다. 안전장치를 모두 점검해 본 에그시가 밑으로 내려갔다.
거의 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이 수색하게 해 달라고 했던 디케이의 펜트하우스가 위험한 형태로 에그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그시는 밧줄을 조심스럽게 조정하면서 건물에 붙었다. 그는 자신이 전혀 의지할 것 없는 매끈매끈한 외면과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인 지상 대신 오직 펜트하우스의 유리벽만 바라보았다.
—에그시, 아무래도 디케이가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 출근 시에 찍힌 모습 말고는 카메라에 잡힌 게 없어. 펜트하우스가 있는 층에는 카메라가 달려있지 않고. 조심해.
“네. 이제 접근할게요.”
에그시의 몸이 훅 내려갔다. 순식간에 에그시는 펜트하우스의 거실 전면에 밀착한 꼴이 됐다.
커튼이나 가구처럼 가림막이 되어 줄 것들이 보이지 않자 에그시는 일단 모서리 쪽에 정지해 몸을 일자로 납작하게 폈다. 에그시가 끊어지는 동작으로 고개를 움직거렸다. 허나 내부에 켜져 있는 빛이 있어 에그시는 재빨리 옆으로 상체를 기울여야 했다.
“멀린 말 대로예요. 안에 누가 있어요.”
—디케이?
에그시가 안경을 건드렸다. 150%로 배율이 높아진 줌이 캐주얼한 상의를 입은 에드윈 디케이를 보여주었다.
“네. 어, 근데….”
에드윈 디케이는 힘없이 늘어진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에그시는 너무도 놀라 말을 잊었다.
“오, 제기랄.”
—왜? 뭔 일이라도 벌어졌어?
“디케이가… 해리랑 같이 있어요.”
멀린과 록시가 나란히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에그시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붙잡았다.
“해리가 혼자 걷지 못하고 있어요. 디케이가 그를 소파에 눕히고… 젠장,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해리는 가만히 있고 디케이는, 그가 마실 것을 가져다줘요. 해리는 그 모든 걸 가만히 받고만 있어요. 제가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죠, 멀린? 디케이가 꼭 해리의 친구 행세를 하는 것 같다고요! 빌어먹을!”
멀린은 곧장 에그시에게 지침을 내려주지 못했다. 에그시는 이를 악문 채 에드윈이 위스키로 추정되는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을 해리에게 쥐어주고, 해리의 팔이 굽혀졌다가 소파 밑으로 스르르 내려가는 장면을 시신경에 새겼다. 에그시는 신경질적으로 줌의 배율을 최대로 올렸다. 해리를 향해 몸을 낮춘 에드윈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에그시가 그의 입모양을 읽었다.
수고했어, 미스터 하트.
30층이 넘어가는 고층 빌딩 특유의 강풍보다 더 날카로운 충격이 에그시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에그시가 뚫지 못하고 있는 유리벽 안쪽, 에드윈은 극심한 현기증에 짓눌려 초점마저 잃은 해리를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두 번이나 부식된 신사의 귓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은 더 이상 영웅도 성인도 아니야. 그건 당신의 과거였지.”
해리의 눈가가 잘게 떨었다. 에드윈이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 해리를 덮었다. 거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전등이 빛을 잃었다.
에그시는 아직도 로프에 매달려 있었다.
⁂
두 형상의 언어가 해리의 의식 속에서 절대성을 띠었다. 첫 번째, 해리 하트는 냉혹한 질서의 은유이며 에드윈 디케이가 추구하는 이상향의 의인화이다.
그것의 토대가 얼마나 인공적이며 왜곡되어 있는지 반추해볼 여유보다는 그것이 해리의 모든 세포에 입력하는 명령어가 더 강력했다. 마치 명치를 찌르는 주삿바늘처럼 그것이 신경을 휘어잡는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그래서 해리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새 삶을 꾀하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사지를 분지르는 것에 어떤 본래적 관념이 있으며, 냉정한 질서라는 뜬구름 잡는 어구가 그러한 행위를 포장할 수 있는지 돌이켜보지 못했다.
실상 철물점 주인은 그저 그런 뉴욕의 시민이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을 갖고 있긴 했다. 낯선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권총을 휘둘렀고 달려드는 해리를 한 번 뒤집어 던지기도 했다. 욕실의 수건걸이를 닮은 굽은 쇠막대가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면서 바닥에 꽂히기도 여러 번이었다. 주인장은 80년대 CIA 공작단으로 활약하면서 연마했던 기술을 있는 대로 발휘했다. 경첩들이 표창처럼 위로 솟구치고 계산대가 엎어졌다.
신속하게 자세를 다잡은 해리의 눈은 남자를 이미 철물점 주인이 아닌 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융통성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란 그토록 무서웠다. 해리는 쇳덩이 대신 자신이 멀리 쳐냈던 남자의 권총을 주웠다. 남자의 막대기가 애꿎은 바닥에 구멍을 내는 순간에 해리는 몸을 굴리면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웠다.
인류는 그들의 무한한 번식력을 유한한 땅 위에서 배설하듯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을 교정할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해리 하트는 존재할 것이다. 해리가 남자의 발목을 뚫었다.
두 번째는 이전의 언어만큼 확고한 틀도 어떤 강압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분 좋은 꿈과 비슷했다.
아주 아득하면서도 자신이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잊을 리가 없는 고향의 친근함과 포용력으로, 그것은 첫 번째 절대성이 관심조차 두지 않는 애정적 대상이라든가 듬직한 이와 공유할 수 있는 신의 따위를 읊조렸다. 해리는 때때로 아지랑이처럼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단어들을 느낄 수 있었다.
에그시가 해리에게 그리운 말들을 전했다.
해리는 에그시를 잊지 않았다. 그를 정 반대 방향으로 잡아끌고 있는 두 세력들의 힘겨루기 가운데서도 해리의 기억은 꿈틀꿈틀 기지개를 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과거에 쌓인 먼지들이 닦여갔다. 에그시는 그 최전방에서 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단지 에그시는 그 꿈결 같은 언어로부터 빠져나와 해리의 엉킨 현실에 기척을 내고 있지 못한 것뿐이었다.
회복과 파괴를 반복하고 있는 해리의 무의식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엉겨 붙은 필름처럼 재생되는 중이었다. 그는 여태까지 한 가지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해리가 선잠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아파트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에그시가 멀린을 몰아붙였다. 록시가 에그시의 어깨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가방 끈을 붙잡았다.
“에그시, 진정해.”
“해리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제기랄, 그 인간이 준 술잔에는 분명 약이 들어가 있었을 거예요. 에드윈 디케이를 의심하면서 여기에 왔고, 그가 해리를 데리고 있는 게 드러났잖아요. 뭐가 더 필요한 거냐고요!”
록시가 아니었다면 에그시의 몸은 앞으로 툭 튕겨져 멀린과 부딪혔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에그시 대신 멀린의 눈치를 살폈다.
“해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까맣게 잊었나?”
드디어 멀린이 입을 열었다. 에그시가 록시를 피하면서 멀린과 대면했다.
“디케이를 붙잡고 해리를 거기서 꺼내오는 것만으로는 속죄를 원하는 그를 진정 구원했다고 말할 순 없어, 에그시.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디케이가 아니라 해리야.”
멀린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해리가 연락했었던 FBI 요원이 살해당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 기억이 나겠지. 해리는 자신이 원하는 죗값을 줄 거라 믿었던 대상을 잃었고 오히려 디케이 때문에 그의 죄책감은 가중되고 있는 형국이야. 우리가 계획 없이 해리를 빼낸다면 그는 이번엔 저 리옹에 있는 인터폴 본부로 도망갈 걸.”
에그시의 안면이 몇 번이고 일그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멀린은 그 누구보다 해리를 되찾고 싶은 청년의 머리에 자극이 될 수 있도록 또렷하게 발음했다.
“해리를 위해 우린 모든 걸 준비해둬야 할 필요가 있다, 에그시.”
에그시의 입술 아래가 꿈틀거렸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당연하지.”
멀린이 에그시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쳤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당분간 출장이다.”
“네?”
“뭐라고요?”
에그시와 록시가 차례대로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멀린은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디케이는 계속 감시하고, 집 잘 지켜.”
멀린이 휭 하고 떠나버렸다.
⁂
멀린이 뉴욕으로 거점을 옳기고 난 이후 제퍼슨이 그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건 것에는 베이커 요원의 살해 소식이 크게 작용했었다.
깨진 창문과 총상의 생김새는 베이커가 스나이퍼의 저격에 의해 사망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였으며 스파이라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저격수 몇몇은 꿰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미국의 킹스맨들을 이끄는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퍼슨이라고 예외는 아닌데다, 그에겐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전부 한 사건에 집중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담력과 추진력도 있었다. 멀린에게 베이커의 범인은 워싱턴 쪽에서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단언을 한지 며칠 만에 제퍼슨은 스나이퍼를 적발해냈다.
자세한 사항을 전달받기 위하여 밤늦게 워싱턴 D.C까지 달려온 멀린은 내부에 켜져 있는 유일한 불빛을 쫓아 걸었다. 제퍼슨이 전등 하나만을 머리에 이고 패널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늦게까지 일하는군.”
제퍼슨이 턱을 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뒤돌았다.
“아, 멀린. 오늘은 못 올 줄 알았는데.”
“자네가 무슨 얘기를 해줄지 너무도 궁금해서 말이야. 뭘 알아냈기에 그리도 나를 급히 부른 건가?”
멀린은 일단 제퍼슨에게 물음부터 던지고 점퍼를 벗었다. 헌데 제퍼슨은 멀린이 빈 의자의 등받이에 옷을 걸 때까지 침묵했다.
마침내 멀린이 패널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빈틈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 제퍼슨이 희미하게 웃으며 패널을 가리켰다.
“내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