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Saint and Sinner 05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성자와 죄인Saint and Sinner
Chapter 3. 신념의 유산A Legacy of Faith
3주가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해리 하트를 괴롭혔던 제일 큰 요인은 기억 상실증이 아니었다. 해리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다.
아무리 파헤쳐 봐도 해리를 향한 존경과 걱정, 애정밖에는 표출하는 것이 없는 청년은 꿈속에서 그의 살의를 자극했다. 해리가 그것이 자신의 본능이 아니라 외상으로부터 나왔음을 확정하기까지는 10일이 걸렸다. 해리는 때로는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진실한 에그시의 태도를 믿었다.
그렇게 되니 불신의 화살은 저절로 해리 자신을 겨냥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는 모조리 참을 수 없어 하는 폭력성은 반복해서 해리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해리는 그것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뢰를 얻은 에그시의 진술에 기댔다. 해리 하트는 아주 뛰어난 킹스맨이고, 에그시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둘도 없는 은인이자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 숫자의 사람들을 살렸다는 일화들을 강압적으로 뇌리에 입력했다. 꿈속에서는 누구나 사악하게 변할 수 있다. 해리 하트는 비밀스럽지만 선한 평화 유지군이다.
해리는 더 이상 무형의 기만 속에서 숨을 쉬는 걸 단념했다.
에그시가 들어왔다. 그는 습관처럼 고개를 양옆으로 휙휙 돌리면서 해리가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에그시.”
해리의 부름에 에그시가 곧바로 거실로 향했다. 해리가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나랑 얘기 좀 할까.”
에그시는 냉기가 도는 해리의 음성에 긴장했다.
“무슨 일 있어요, 해리?”
해리는 직업 탓인지 신사적이기는 해도 절절한 온정이 느껴질 만한 언행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해리에 대해서 에그시가 배운 몇 안 되는 사실이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해리의 얼굴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나는 네가 말해줬던 것들을 믿는다. 실상 네가 아니면 달리 내 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나한테 적어도 거짓말은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맞아요. 전 늘 해리한테 솔직했어요.”
“하지만 은폐는 거짓과는 다른 개념이지.”
에그시는 슬슬 해리가 본론을 꺼내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지금 털어놓도록 해라.”
에그시는 일순간 자신이 해리를 대신하여 위임받은 또 다른 진실이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그는 방금 전에 멀린과 만나 아직 해리가 짊어져서는 안 되는 사정을 떠안은 상태였다.
“해리, 갑자기 왜 그래요? 별로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거예요? 제가 아는 거라면 설명해드릴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에그시와 마찬가지로, 웃음이나 눈물은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거대한 무게감에 해리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보렴.”
해리의 손짓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종이 한 장이 에그시의 앞에 도달했다. 에그시는 그걸 보고 입을 벌렸다.
“맙소사, 어디서 이런 걸….”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이 종이가 미국에서 약 80명의 무고한 교인들을 몰살했다는 용의자의 인상착의와 폐쇄 회로 TV에 찍힌 사진을 포함한 수배령을 담고 있음을 서술하라는 게 아니다.”
해리의 목소리는 갈수록 서늘해졌다.
“내가 이 극악무도한 살인자인지 아닌지를 밝혀달라는 거야.”
“해리.”
에그시는 일단 해리를 불렀다. 사고의 회선이 얼음과 불에 동시에 지져지면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에그시는 어떻게 해서든 해리를 붙잡아야 한다는 건 알았다.
“아주 간단한 답변도 좋아.”
“해리, 이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오, 그래? 그렇다면 내 추측과는 달리 이 지명수배를 받는 자가 나와는 다른 사람인가보구나.”
에그시는 제멋대로 경련하는 입가를 꽉 눌렀다. 해리는 에그시가 기를 쓰고 대답을 하려는 몸부림을 관조했다.
“정말 힘들겠지만 당신이 이해해야 해요. 이건….”
“무고함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에그시.”
에그시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해리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 때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일부러, 당신 어딘가에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어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니에요. 당신은 살인마가 아니에요.”
에그시의 눈 주변은 벌써 한바탕 울음을 쏟아낸 양 빨갰다. 해리는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리고 있는 그에게 진심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내가 이 사진 속 남자와 같은 인물이라면 나는 살인마가 맞다.”
“해리. 해리, 잠깐만요!”
에그시가 해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해리는 스스로 뒤로 돌아 에그시를 응시했다.
“제가 당신이 한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해리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볼게요.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세요.”
“…네가 맞다, 에그시.”
해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그시의 손을 떼어냈다. 부질없이 꿈틀대는 그의 손가락을 잘 모아주고 해리가 한 발짝 에그시에게서 멀어졌다.
“너도 나도 내가 한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 그러니 나를 잡지 말거라.”
에그시는 그 자리에 꼼짝 없이 굳었다. 해리는 조용히 겉옷을 챙겨 에그시를 떠났다. 그 모든 것이 에그시에게는 자신의 제어력을 벗어나 무한히 재생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영화였다. 에그시는 한참이나 그 수동성에서 허우적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에그시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꺼냈다.
“멀린, 거기 있죠? 도와주세요. 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에그시가 문가에서 의미 없이 서성였다. 이곳에 있던 해리의 자취는 어느새 에그시의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해리가… 해리가 가버렸어요.”
—잠깐, 뭐? 어딜 갔는데?
“미국으로요.”
—뭐라고!
에그시가 얼굴을 푹 꺾었다. 눈동자가 터질 것 같았다.
“해리가 FBI한테 자수하고 말 거예요….”
⁂
“대체 어떤 놈이 해리한테 그딴 걸 보낸 거야?!”
멀린은 전례 없이 신경질을 내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멀린의 호출을 무시할 수 없어 본부까지 온 에그시는 옆에서 그 번거로운 발걸음을 소득 없는 수고로움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해리를 끝까지 막을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에그시,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잘못한 건 조금도 없어. 자책하지 말고, 우선 해리가 미국으로 날아가는 걸 막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자. 알겠지?”
그제서야 에그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늘 길을 막아야겠네요.”
“좋은 지적이다. 그래서 내가 CAA(영국 민간항공관리국)와 접촉하고 있는 중이지.”
멀린은 통신을 연결하면서 왼쪽 모니터에는 주요 도로들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늘어놓았다.
“해리를 태운 비행기가 절대 이륙할 수 없도록 내가 조치를 취해볼 테니, 너는 영국의 모든 공항에 해리의 사진을 배포하고 사진 속 인물이 나타나면 일단 잡아두게 만들어. 정보부에 연락하면 최대한 협조해줄 거다.”
“알겠어요.”
에그시에게 긴장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준 멀린은 뒤이어 오른쪽 모니터를 채울 수 있는 자료들을 탐색했다. 히스로 공항을 위시해 개트윅, 런던 시티 등 이용 빈도수가 높은 공항들의 내부 영상이 속속 멀린의 화면 안으로 합류했다.
⁂
해리 하트가 탄 택시가 인도 옆에 멈췄다. 가방 하나 없이 차에서 내린 해리는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살짝 움직임을 지체했다.
저편에서 해리를 향해 크게 팔을 흔드는 이가 있었다. 해리는 예의를 차린 미소를 장착하고 그와 인사했다.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추자 주변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영국의 주요 국제공항들은 윗선에서 느닷없이 내려온 지시 때문에 부산한 분위기였다. 유니폼을 입은 공항 직원들이 유독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더 주었으나 그뿐이었고,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출국 심사대에서는 경보음이 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예정대로 뜨고 내려앉았다.
멀린은 그 평화로움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망했군.”
막 멀린의 오퍼레이팅 룸으로 들어온 에그시가 멈칫했다. 멀린이 온몸에 힘을 빼고 등받이에 체중을 실었다.
“해리가 영국을 떠버렸어.”
“네? 공항 쪽은 아직 잠잠한데요?”
“정보부나 CAA보다 강한 연줄을 동원했으니 당연하지. 제길, 나라고 왕실을 막을 재간이 있는 건 아니거든.”
해리의 품새를 미루어봤을 때 그가 보통 집안 소속은 아닐 줄 예상했으나, 영국 왕실과도 닿아있는 수준의 권세는 상상도 못 했던 에그시는 경악했다.
“해리가 몰래 비행기 하나 타자고 왕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요?”
멀린이 중앙의 모니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에그시도 들어본 적 없는 멀린의 개인 번호에 수신된 한 문자 메시지의 전문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트 씨는 안전하게 비행기에 탑승하셨으니 염려 마시길 바랍니다. - 조종사 스티븐 크로캐트로부터.’
에그시는 해리의 비행을 책임질 듯한 스티븐이라는 조종사가 엠파이어 테스트 조종사 학교(ETPS)를 이끄는 영국에서 제일 뛰어난 파일럿이라는 건 몰랐다. 그러나 해리가 먼저 보낸 메시지를 통해 멀린이 해리의 출국 소식을 접했다는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에겐 그렇게 까다로운 일도 아니었을 거야. 가문의 영향력을 빌리면 됐을 테니까.”
에그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어본 귀족 작위들을 속으로 쭉 읊어보았다. 하트 공작? 하트 남작? 에그시는 어쩌면 해리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5촌쯤 되는 왕족일 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잠깐 빠졌다. 그는 멀린이 눈앞에서 손바람을 일으키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럼 이젠 어쩌죠?”
“이번에는 휴가를 좀 길게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에그시, 란슬롯을 불러. 해리 잡으러 가야겠다.”
요원을 보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요원을 가장 안전하게 생포하고자 킹스맨이 나선 역사는 19세기에 설립된 이 조직에서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멀린은 한때 자신의 믿음직한 동료가 일종의 골칫덩이가 되어버린 걸 애석해하며 장비를 챙겼다.
⁂
제트기를 타지 않는 이상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려면 약 8시간가량을 소모해야 했다. 해리는 눈에 휴식을 안겨줄 심산으로 눈꺼풀을 닫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해리는 난잡한 장식이 가득한 교회에 있었다.
그는 밖에 서 있을 푯말을 보지 않고도 교회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해리가 있는 곳은 사우스 글레이드 교회였다. 그는 어김없이 총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넘어 처음으로 교회의 내부를 동공 안에 담았다. 에그시가 없는 대신 수많은 사체가 해리를 맞이했다.
해리는 목 위쪽이 불에 타버렸거나 수류탄에 맞아 사지 중 일부가 날아간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총을 맞고 즉사한 케이스가 도리어 너그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79명이었고, 해리가 수배 전단에서 읽었던 것과 일치했다.
해리는 자가 치유되고 있던 자신의 기억 세포들이 왜 이 장면만 빗겨갔었는지 마침내 수긍했다. 그의 충성스러운 무의식은 해리가 받을 충격을 염려한 나머지, 실존했던 일을 삭제하기는 불가능하니 그는 진실을 왜곡하여 일종의 환상으로 격하시킨 것이었다.
해리는 현장에 펼쳐져 있는 것들을 천천히 학습했다. 그 검붉은 가르침들이 일러주는 것은 하나였다.
해리 하트는 학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