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

[Kingsman/아서&해리] A Chance

Jade E. Sauniere 2015. 5. 12. 19:37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Chester King

- 2015/03/08

- Written by. Jade


A Chance






  터틀넥 셔츠를 입은 청년은 팔을 서로 엇갈려 놓은 채 철제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분노한 것 같지도, 절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사색을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체스터 킹은 안쪽에선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유리창을 통해서 가만히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을 뿐인 청년을 살피고 있었다. 니트 소재의 셔츠는 청년의 상체에 달라붙어 그의 곡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청년은 다부진 체격이 아니었다. 감자가 약간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청년은 런던에서 옥스퍼드를 넘어가는 여정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기차 안에서 쓰러질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체스터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체스터가 청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그의 외양이 아니었기에 그는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훅 하고서 체스터의 안경을 스쳐 지나갔다. 청년은 그저 추위 탓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체스터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충분히 단련된 체스터의 순발력이 아니었다면, 그조차 청년의 눈동자가 살짝 다른 빛을 띠었다가 순식간에 무심한 베일을 덮어 썼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아무래도 체스터의 옷차림 때문인 듯했다. 청년이라면 런던 경찰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체스터가 입는 것과 같이 고급스러운 슈트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쥐지 못함을 알 것이다. 그래서 청년은 잠깐 사고했다. 가문에서 혹시 변호사를 보내줬나?

 

  잡혀온 죄목이 죄목이니만큼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청년은 희망이 아니라 약간의 의아함으로 체스터를 응시했다. 체스터가 청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아마도요." 

  

  청년의 답변은 특이했다. 


  "너무 복잡한 주제가 아니어야 할 거예요. 곧 있으면 저는 취조실이 아니라 감옥으로 옮겨져야 할 테니까." 

  "겉보기와는 다르게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군." 

  "겉보기와 다르다고요?"

 

  "지금 자네를 가장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내부의 낮은 온도처럼 보이네. 케임브리지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에게 동조한 국가 반역죄가 아니라." 

  "저는 그 스파이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어요." 

  "하지만 신고도 하지 않았지." 


  청년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아마 영국에 위협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정부가 판단해야 하지, 자네의 몫은 아니야."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자신의 변호사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이렇게 처벌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청년이 일말의 의아함도 쓸모없는 것으로 내팽개쳐 버렸을 즈음에 체스터가 그의 주의를 환기시킬 만한 한 마디를 던졌다. 


  "왜 신고를 하지 않았나, 해리?"


  청년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커졌다. 


  "괜찮다면 네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허락해줬으면 좋겠구나."

  "상관없어요. 그런데…" 


  청년은 등받이에서 몸을 떼진 않고 있었다. 만일 청년이 상체를 움직여서 체스터 쪽으로 기울이게 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패배와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의 승리를 공고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체스터는 아름답고 영리하며 명망 높은 하트 가문의 차남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물론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 카운터펀치가 될 수는 없었다. 


  "제 이름을 왜 그런 식으로 부르시죠?" 


  체스터는 속으로 청년의 날카로움에 감탄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구나."

  "내 죄에 관한 질문을 하면서, 정작 죄인을 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잖아요."

 

  "그것까지 읽어냈다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구나. 왜 스파이의 정체를 경찰에 알리지 않았지? 너라면 경찰도 믿을 만한 증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청년, 해리 하트는 도톰함 터틀넥의 소맷자락을 두어 번 만지작댔다. 체스터는 해리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눈에 전부 담았다. 저 청년의 세밀하고 얌전한 동작이 어떤 흥미로운 답변을 유발해 낼지 궁금했다.

 

  해리는 소맷자락을 세 번 이상 문지르지는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싶었거든요." 

  "스파이의 궤변을?"

  "저에게 자극이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체스터가 해리가 볼 수 있게 눈썹을 올렸다. 


  "그것 참 놀랍구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에게 영국은 비판할 것들이 하나의 선물처럼 모여 있는 끔찍한 나라였겠죠. 그는 틈만 나면 입헌군주정의 정치적 불안성과 모순을 설파해댔습니다. 앙시엥 레짐이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서요. 엉터리인 점도 물론 많았습니다만 한편으론 신선했습니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극단을 포함해야 해요. 그 극단적인 외침들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부조리함을 골고루 느꼈지요."

 

  체스터는 해리에게 자신이 그의 말을 대단히 잘 경청하고 있다는 시선을 계속 보내었다. 해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세상은 지금 서로를 비난할 뿐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 것이 싫었기 때문에 저는 제가 가장 제 곁에 쉽게 둘 수 있는 극단을 내버려뒀던 것입니다. 이 나라에 어떤 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요." 


  해리가 말을 마쳤다. 체스터는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짧게 쳐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훌륭하구나, 해리." 


  하지만 칭찬 한 자락 해주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이 총명한 청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체스터는 진실하게 해리의 비범함을 치켜세웠다. 수려한 청년의 미간에 다시금 주름이 잡혔다.

 

  "이제 제가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물론이다." 


  사실 체스터는 해리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체스터는 해리가 자신의 정체를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왜 나의 생각을 들으려고 하죠?"

 

  체스터는 황급히 자신의 예상안을 지우고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게 가장 궁금한 거니?" 

  "네." 


  해리 하트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변호사도, 경찰도 아닌 이가 자신의 철학을 굳이 건드려 구체화해주려 애쓰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체스터는 자신이 해리와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 감사해했다. 그가 답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필요로 하는 거니까." 


  반대편 옷자락을 쥐고 있던 해리의 왼팔이 내려갔다. 


  "나는 지금 너의 죄목을 무효화하고 너를 이곳에서 꺼내줄 수 있다. 만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네가 빌려간다면, 너 역시 내가 원하는 거를 넘겨줘야 할 거야."

 

  "제 생각을요?" 

  "그래. 이 편견의 시대에도 양자를 동등하게 취하려 하는 그 균형과 현명함의 철학을." 

  "….그건 단순히 몇 가지의 언어로 넘겨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거다." 


  해리가 또 반듯한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당분간 네 신병을 맡았으면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어딘가에 추천하고 싶은데,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은 자리라서 말이야." 

  "….일자리 말인가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당신이 있는 그 자리와 비슷한가요?" 

  "불리는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아." 


  해리의 두 팔이 완전히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청년에겐 아마 대답을 궁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체스터는 재킷 주름을 펴고 그 위에 손을 얹어놓았다. 그러면서 슬쩍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노출했다. 체스터가 초침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해리 하트의 판단력과 순발력을 측정하고 있었다. 일 초, 이, 초.


  그동안 해리 하트의 두뇌는 소리 없이 작동했다. 자신과 동일한 위치를 제안하고 있는 남자를 어떻게 해서든 분석해야 했다. 해리는 추리했다. 말씨가 고급스럽고, 경험으로 다져진 침착함으로 미뤄봤을 때 남자는 중류층 이상이었다. 슈트와 크게 친숙하지 않은 해리도 감지할 수 있는 원단과 곡선의 고급스러움은 남자가 그저 그런 공무원은 아닐 거라는 가설을 강하게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법기관과 접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는 최종적으로 남자를 절제되어 있으나 강력한 권위를 가진 상위층으로 정의했다. 그러고 나니 해리의 머릿속에 명확히 빛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남자는 정확히 해리가 필요성을 절감하던 모든 걸 소유하고 있었다.

 

  냉전 시대에 해리와 같이 보편을 추구하는 일종의 세계주의는 마르크스 혁명파, 아나키스트, 심지어는 불손한 생각을 가진 반역자의 낙인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경로였다. 영리한 해리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발아래 두고 있는 국가가 위치해 있는 진영과, 자신이 타고난 가문과 곧 자신의 곁으로 다가올 기득권들도 이 전쟁보다 더 치졸한 시기만 지난다면 더 이상 자신과 반목하는 일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주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해리 하트는 그 기약 없는 기다림을 내던져도 되는 지름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당신은 날 오랫동안 지켜봤나요?"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어. 자네가 케임브리지에 입학했던 무렵이었으니까." 

  "…그 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론을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 때도 넌 총명했지." 


  이것은 이를테면 마지막 절차였다. 체스터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네가 진정한 이끌림을 받아, 이 왜곡된 세기에 숨구멍을 만들어 줄 단 하나의 기사라는 걸 그 때부터 직감했다." 


  해리는 체스터의 어휘 선택이 독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와 같이 나가겠니?" 


  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해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체스터 킹은 성공했다. 해리 하트는 그의 갤러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