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Somebody to Die For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Eggsy
- 2015/03/05
- Written by. Jade
Somebody to Die For
새벽녘에 에그시는 집으로 돌아왔다. 살짝 끌리려 하는 발을 현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에그시는 문을 잠갔다. 그는 특별히 걸으면서 나는 소리를 줄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동생과 엄마의 잠을 깨우기 싫어서 에그시는 늦은 밤 본부에서 해방될 때마다 다른 곳을 애용했다. 에그시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넥타이를 잡아 빼고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휙휙 풀어 방에 있는 의자에 던졌다.
몸을 씻고 나온 에그시는 늘어져 있는 셔츠만큼이나 기운 없이 편한 바지를 꿰어 입었다. 그는 얼굴이 베게에 정면으로 파묻히는 방향으로 침대 위에 내려앉았다. 태양이 뜨기 전 가장 차갑고 어두운 새벽이 지친 에그시의 눈꺼풀을 압박했다. 에그시는 등 아래에 깔려 있던 이불을 끄집어내 대충 둘렀다.
에그시는 잠들기 직전 커튼을 치는 해리 하트의 뒷모습을 보았다.
⁂
에그시가 손사래를 치면서 침대 위에서 허우적댔다. 한 뼘도 가려지지 않은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빛에 찔려 퍼덕대던 에그시는 간밤에 자신이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양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옷가지들을 들고 세탁물을 모아 놓는 바구니 속으로 던진 다음 주방으로 내려갔다. 해리가 비어가는 오렌지 주스 병을 꺼내고 있었다.
“어제 늦게 들어왔잖니.”
“햇빛이 워낙 세서 더 잘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내가 어제 커튼을 걷었는데….”
“당신이 걷는다고 될 리가 없잖아요.”
에그시가 냉장고를 열고 다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그가 힘없는 호흡을 뱉으면서 해리를 지나쳐 묶여 있는 토스트 봉지를 풀었다. 해리는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그시가 혼자서 접시와 잼을 바를 나이프 등을 꺼내고 있는 동안 해리는 사라졌다. 에그시는 입술을 말아 깨물고 빵이 부서져라 잼을 펴 발랐다. 해리가 에그시를 위해서 열심히 손댔던 물건들은 그의 손을 피해가는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끄떡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 집에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에그시가 빵을 씹으면서 거실을 살짝 내다보았다. 해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파 쿠션이라든가 테이블에 나와 있는 유리잔 등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에그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꽉 감으며 등을 돌렸다. 에그시가 어질러 놓은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그시가 나서지 않으면 영영 변하지 않을 혼란이었다.
에그시는 등 뒤에 느껴지는 해리의 안쓰러운 시선을 피해 도망쳤다.
⁂
오늘은 에그시가 양복점에 갈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에그시는 메모지 하나를 북 찢어서 집안에 있는 서랍들을 구석구석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종이와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마트에서 사야 할 품목들을 적어나갔다. 에그시가 소비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에그시가 외출했다. 며칠 만에 해리처럼 우산을 챙기는 행동을 단념한 전적이 있는 에그시는, 하던 대로 야구 모자를 약간 비뚤게 쓴 다음에 마트로 갔다. 담배나 술은 누구보다 신속하게 살 수 있는 그였지만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양배추와 사과 사이에서 건실한 걸 골라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에그시는 일곱 번쯤 사과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겨우 봉지를 뜯어서 필요한 만큼 과일을 담았다.
카트가 생활 용품과 먹을거리로 한가득 찼다. 에그시는 계산을 마친 뒤 구입 물품들이 배달되어야 하는 주소까지 적었다. 에그시가 후련해하면서 뒤를 착 돌았다.
“…이런 젠장.”
딴에는 최대한 시간을 단축한다고 애를 썼었으나,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보기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에그시가 마트 출입구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그시.”
색깔 있는 안경을 쓴 해리가 부드럽게 에그시를 불렀다.
“우산을 챙겨가지 않았더구나.”
해리가 현관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검은색 장우산을 흔들었다. 그것은 해리 하트가 집에다 둔 우산이 맞았다. 에그시가 해리를 바라보았다.
“같이 집에 가자.”
해리는 먼저 우산을 펴고 에그시에게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지어보였다. 에그시는 그 공허한 호의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워요.”
에그시가 해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굵은 빗방울이 야구 모자의 정 가운데로 떨어졌다. 에그시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옷은 어느새 흠뻑 젖었고, 모자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던 머리카락들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피부에 달라붙었다. 우비나 코트의 깃 등으로 비를 조금이라도 피할 나름의 방책을 마련한 런던 시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에그시는 그 속에서 물방울을 일으키며 걷고 있었다. 해리의 자애롭고 따뜻한 우산은 없었다. 고작 빗줄기가 에그시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사를 통째로 씻겨버리고 말았다.
에그시는 상체를 수그린 채 뛰었다. 검은 우산을 쓴 해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또 다시 에그시의 뒤쪽에서 그를 방관하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
집으로 돌아온 에그시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에그시는 재빨리 벽난로에 불부터 지폈다.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주르륵 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남았다.
걸레질을 해야 할 이유와 더불어 빨랫감이 늘었다는 생각에 에그시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털었다. 일단 몸이 너무 추웠으므로 에그시는 난롯가에 조금 머물기로 했다.
그 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그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옷은 벗어서 나한테 주렴, 에그시.”
에그시보다 늦게 들어온 해리가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자 무릎을 굽혔다. 에그시는 약하게 부여잡았을 뿐인데 물이 떨어지는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차 한 잔 끓여줄까?”
“해리, 이럴 필요 없어요.”
에그시의 얼굴은 장작에서 피어오르는 주황색 불꽃보다 더 붉었다.
“당신은 더 이상 나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당신이 살아 있지 않는 이상, 당신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해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순수한 슬픔과 자괴감이 건장한 신사의 온몸을 물들였다. 에그시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젠장,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렇게 감정에 충실한 표정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요. 적어도 내가 봤던 해리는 그래요. 그는 눈썹을 내리거나 약간 줄어든 눈동자로 자신의 심정을 겨우 표현할 뿐이었죠. 제발 가줘요. 당신도 나도 편해지자고요.”
해리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의 손끝은 완벽하게 불길의 색깔을 입었다. 하나의 불씨가 되어버린 듯한 그것이 에그시에게 이 지독한 비현실성을 경고했다.
“…왜 내가 너를 지켜보는 것도 거부하는 거니.”
“그렇다면 죽지 말았어야죠.”
에그시는 기어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살아서, 살아서 당신이 여기까지 끌어올린 생명을 계속 돌봐줬어야죠.”
에그시의 팔이 허공을 저었다. 환영은 사라졌다. 난롯불 옆에 있으면서도 에그시는 머리와 가슴 모두 생명 활동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듯한 한기를 느꼈다. 에그시가 세운 무릎에 이마를 갖다 댔다.
비행기를 탄 해리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후, 그의 우산은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
해리는 신기하게도 에그시가 임무를 하달 받고 있거나, 임무를 위해 파견되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멀린이나 록시조차 에그시가 해리의 모습과 자꾸 부딪힌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반면 에그시가 지령으로부터 자유롭기만 하면 해리는 그의 옆을 거닐면서 이것저것 그를 거들려고 했다. 해리는 에그시가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그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길 원했으며 사소하고 일상적인 호의를 건네고 싶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에그시는 언제나 집안일을 하거나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는 해리를 보았다.
“왜 당신은 나한테만 나타나요?”
어느 날 밤에 무척이나 속이 답답해진 에그시는 책을 읽고 있는 해리에게 물었다. 해리가 반쯤 책을 덮었다.
“아니, 당신한테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근데 제가 제 무의식한테 말을 걸 수 있어야 말이죠.”
에그시는 거짓된 명랑함과 진실한 비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해리는 에그시가 실제로 기억하는 것보다는 더 정감 어린, 그래서 에그시가 사실은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눈빛을 띠었다.
“네가 나를 올바른 방식으로 기억해줄 수 있다면 난 떠날 수 있단다.”
“그 올바른 방식이라는 게 뭔데요?”
“나를 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
에그시의 목구멍이 탁 막혔다. 에그시는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에겐 그 무엇보다 잔인한 언어를 흘리고 있는 해리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게 미안해하지 마라. 나를 이따금씩 추억해주는 건 좋지만 극단적인 순간을 빌어야 내 생각을 잊을 수 있는 심리 상태는 너에게 좋지 않아. 나는 이제 너의 추억이야, 에그시. 아상하지는 않되 천천히 먼지를 맞아 가면 될 뿐인 그런 존재야.”
에그시는 대답이 없었다. 점점 어둠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에그시의 얼굴을 외면하지 못하고 해리가 일어났다. 해리는 이태까지 에그시의 주변을 맴돌아도 절대 에그시와 접촉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환상이 자신의 근원이 되는 청년의 현실을 존중해주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었다.
그러나 지금 에그시는 해리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를 그저 네 시간의 작은 조각으로 받아들여주렴.”
에그시는 정말로 그 말에 반응을 보이고 싶었음에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
“해리, 지금 있어요?”
에그시는 재킷 자락이 팔락거리면서 공기를 흩트리는 소음을 들었다. 에그시가 쓰게 웃었다. 그런 속임수 없이도 에그시는 해리가 자신의 사방을 떠돌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식이 해리의 영상을 감각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해리가 충분히 접근한 느낌이 들자 에그시가 의자를 돌렸다.
“에그시, 대체 무슨….”
에그시는 양복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스톨을 들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한 해리가 미간을 좁혔다.
“그 총 내려 놓거라, 에그시.”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의미는 내가 정하는 거예요. 당신이 아니에요.”
에그시의 손가락에 걸린 권총이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에그시는 손가락 하나에 꿰여서 휘청거리고 있는 총을 힐끗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고 나를 괴롭히는 환상이죠. 그렇지만 당신은 또 둘도 없는 나의 선생님이었고 구원자였고….”
권총의 손잡이 부분이 에그시의 손바닥에 딱 맞닿았다.
“내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빛이에요.”
해리가 다급하게 에그시와의 거리를 좁혔다.
“안 돼, 에그시. 내가 있는 이 어둠 속으로 들어오려 하면 안 된다. 너는 이 밤에 갇혀서 뉘우쳐야 할 죄가 없어.”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말해줬던 시의 구절이네요.”
에그시는 모호한 안색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대롱거리던 총은 에그시의 살갗에서 떨어져 나오질 않았다.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가능성과 헤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킹스맨이라면 죽음에 쉽게 굴복해선 안 된다면서 나한테 알려줬었죠. 멋진 말이에요. ‘순순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고. 이런 때에 시의 한 구절을 빌릴 수 있다니, 정말 해리 같아요.”
해리가 마침내 에그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해리가 차근차근 몸을 구부렸다. 그러면서도 현실보다 강력하면서 추억만큼 형체가 없는 그의 시선은 에그시의 머리 위로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그시의 목소리는 잔뜩 짓눌린 채 새어나왔다.
“어차피 당신이 없는 여기도 캄캄해요. 빛의 그림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이 세계가 나에겐 가장 가혹한 어둠인데…. 내가 여기서 견뎌낼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겠어요. 차라리 당신이 있는 영원한 밤으로 가겠어요.”
해리가 피스톨을 쥔 에그시의 손을 감쌌다. 그러나 그것은 에그시가 차마 총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광경을 포장하고 있는 얄팍한 환상에 불과했다. 해리는 총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돌리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나를 이 이상의 무력감으로 밀어 넣지 말거라, 에그시. 차라리 내가 떠나겠다. 네 눈앞에서 사라져줄 테니 넌 죽으면 안 돼.”
“어떻게요? 당신도 결국 내가 만들어낸 거잖아요. 내가 방금 전처럼 부르면 다시 올 거면서.”
이미 사라져버린 에그시의 빛이 그 위대한 이정표의 부재에 분노하고자 하는 영혼을 감쌌다. 에그시가 해리에게 안긴 채 읊조렸다.
“해리, 당신이 정말로 그리웠어요.”
두 사람이 나란히 눈을 감았다. 에그시는 마지막까지 해리의 숨소리를 들었다.
And I don't need this life
I just need Somebody to die for
Somebody to cry for
When I'm lonely
Don'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on against the dying light
'Somebody to Die For' by Hurts, Unplugged ver.
& Inspired by a Poem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f Dylan Thomas
<센 강에 던지는 헌정사>에 수록된 '비탄하는 지성'에서 일부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