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My Compelling Mirror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Eggsy
- 2015/02/19
- Written by. Jade
My Compelling Mirror
청년은 한 번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동경해 본 적이 없었다. 눈부시기만 한 전등은 그가 가리고 싶은 부분마저 모조리 비추었다. 청년은 늘 실밥이 터진 모자 아래에 숨어 있는 자신의 야망과 직면해야 했다.
청년의 얼굴을 아주 고급스럽게 본뜬 다음 은유화한 건물은 청년이 흉내 내기 어려운 품위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의 발꿈치를 한껏 쳐들어도 닿을 수 없는 천장은 저절로 윤기가 났으며, 한낱 시시한 전등불마저 부드럽게 포용해 그것에 아름다움을 불어넣었다. 미국 국회 의사당은 청년이 동경하는 단 하나의 은유이자, 본래 관념과 너무나도 멀어진 불패의 추상화였다.
시작은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던 포스터였다. 포스터는 말라붙은 밀이 볼 수 있는 풍경의 전부라는 촌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한 상원의원이 미국의 주요 대학과 미술관을 직접 안내해준다는 행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청년은 별 생각 없이 그걸 읽었다. 크게 정치인의 활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포스터 속 상원의원은 다 알 터였다. 어렵게 대학 교수가 된 지 3년 만에 강단을 나와 정계에 입문한 이력도 특이한데, 부드럽고 신사적인 언변과 시민들의 속을 들여다보고 내놓는 것 같은 각종 의견과 제안들로 삽시간에 유명인사가 된 인물이었다. 청년은 버스가 오기 전까지 계속 그 포스터를 보았다.
청년은 이끌리듯 행사장으로 갔다. 본래 기자회견과 인터뷰는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던데, 워낙 언론에서 들이대는 통에 급히 마련한 자리라고 했다. 청년은 슬그머니 그 자리에 끼었다. 청년은 증거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어, 어딘가에 스며들고 필기구 없이 무언가를 외우는 게 특별히 어렵진 않았다.
그런 청년의 뇌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흥분과 보람, 하다못해 위선마저 느껴지지 않는 상원의원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청년이 거울을 보았을 때 목격하길 바랐던 표정과 조금의 오차 없이 일치했다. 초월적인 목표 의식과 이성, 그것을 조종하는 야망 모두가 상원의원이 뿔테 안경으로 가리고 있는 눈동자 뒤에 존재했다.
청년은 어느 때보다 자신의 재주를 심도 있게 발휘하여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단 하나의 장애물을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청년이 허리춤에 걸려 있던 가짜 출입증을 손에 쥐었다. 이 문만 치워내면 청년은 자신의 이성과 독대할 수 있었다. 청년이 문을 열었다.
세상을 주무르는 권력의 중심에 발을 걸친 자의 집무실은 첫 번째로 향이 없었다. 여인의 짙은 향수 냄새와 위스키가 공기 중에 남기는 잔향도 없이 깨끗한 공기가 방 안을 떠돌았다. 그 중앙에 안경을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뒤로 넓게 뚫린 창문은 비록 그가 설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에겐 없어서는 안 될 장식물처럼 보였다.
상원의원은 청년이 누군가의 전령이거나 비서라고 생각했던 듯 계속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청년은 말문을 여는 대신 의원의 책상에 봉투 하나를 올려놓았다.
“나중에 필요하실 거예요.”
로렌초 데 메디치를 그리면서 몽블랑 사가 내놓은 한정판 만년필이 정갈하게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상원의원은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는 부류였다.
“이게 뭔가.”
상원의원은 청년의 정체보다 내용물을 먼저 물었다.
“제 아무리 의원님이라도 예고 없이 다가오는 악재를 만나실 수 있으니까요.”
상원의원이 봉투를 열었다. 그는 몇 장만 읽어보고 봉투에 들어 있는 자료의 성질을 파악한 뒤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순간 눈동자를 돌렸고, 덕분에 그는 자신의 복장이 주말 바자회에서 구입한 싸구려 양복이라는 걸 상원의원이 간파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 정보를 확보하느라 양복을 맞출 여유는 없었나 보군.”
청년은 뜨끔했다. 시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아주 촉박해서 재단사와 치수를 상의할 여유도 없었다든가.”
청년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상원의원이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
상원의원이 주먹을 쥐고 있는 청년의 손을 가리켰다. 청년이 위조한 출입증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그도 청년 같은 풋내기는 국회 의사당에 정당하게 출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청년이 말없이 출입증을 건넸다. 의원이 힐끗 그것을 확인했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뭔지 말해주겠나, 에그시 언윈 군?”
청년과 상원의원의 눈동자가 만났다.
“당신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
에그시가 상원의원을 찾을 때마다 내미는 출입증은 그가 예전에 써먹었던 것만큼이나 허위 사실로 가득했다. 에그시는 해리 하트 상원의원의 수행원이라기보다는 비밀 정보원에 가까웠다. 살고 있는 동네만큼이나 은밀하고 교묘한 술수에 능한 에그시는 같은 당 정치인들의 약점과 비리, 여성 편력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아서 하트 의원에게 제공했다.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대선 후보를 가리는 당내 경선일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었다. 여기에 에그시는 상대편 당에 속한 의원들의 자료도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고 있었다.
에그시가 나타난 후에도 해리 하트는 여전히 현직 상원의원이었고 사회학과 미술사학 학위를 가진 전직 교수였으며, 균형 잡힌 도시 설계에 관심이 많은 젊은 운동가였다. 그렇지만 해리 하트가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그 타이틀을 던져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에그시였다.
해리는 워싱턴의 오벨리스크가 하늘 위로 쏘아 올리는 불빛을 응시하면서 오늘의 봉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그시 언윈에 대해서는 그도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 이외에는 어디에서 공부를 했는지,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지 나오는 게 없었다. 해리가 에그시에 관해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은 그가 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점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그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해리가 고개를 틀었다.
“부탁하신 거 가져왔어요.”
최근 자신의 뒤를 캐는 자가 있어 해리는 에그시에게 그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었다. 에그시가 준 파일에서 낯익은 얼굴을 본 해리는 살짝 웃으며 파일을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제가 따로 조치를 취하길 바라시나요.”
“아직은 아니네. 내가 더 멋진 계획이 떠오르면 부르도록 하지.”
에그시는 희미하게 알았다는 고갯짓을 한 뒤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잠깐, 에그시.”
에그시가 우뚝 멈춰 섰다. 에그시는 해리가 자신을 편하게 호칭하기만 하면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내가 주는 보수가 모자라진 않을 텐데도 자네는 옷을 사 입는 법이 없군.”
에그시가 자신의 옷차림을 훑었다. 해리는 ‘그래도 의사당에 올 때는 옷도 다려 입고 표백제도 쓴단 말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한 에그시의 눈빛을 읽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와서 이거 받아가게.”
해리가 지갑에서 명함 하나와 플래티늄 카드를 꺼냈다. 에그시가 젊은 청년답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계속 팔을 들고 있어야겠나.”
해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에그시가 주섬주섬 해리의 신용 카드를 받았다. 에그시가 카드 뒤에 붙은 명함을 확인했다. 해리가 때때로 찾는 양복점의 명함이었다.
“내일 연락을 넣어둘 테니 최대한 빨리 들르도록. 자네의 필요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런 밤중에 찾아오는 일은 줄어들 거야.”
“…감사합니다.”
에그시가 느릿하게 뒤를 돌았다. 그의 뒤통수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서 해리는 잠시 미소 지었다.
⁂
에그시는 해리가 여비서에게 우편물을 한가득 받아 드는 것을 보았다. 본회의장에서 빠져 나오는 의원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보좌관들로 건물이 시끌시끌했다. 에그시는 능숙하게 검문대를 통과하고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해리 하트의 양복을 책임지는 재단사의 실력은 과연 일류급이라 에그시는 편안한 라운드 티셔츠를 입었을 때만큼 자유롭게 움직였다.
해리는 비서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시에 우편물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해리는 때로는 봉투의 뒷면만 보고도 반송해야 할 편지들을 구별해냈다. 에그시는 기회를 엿보다가 비서가 자리를 뜨자마자 해리의 옆을 꿰찼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해리의 집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해리 하트와 비슷한 양복을 입은 에그시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
대부분 불이 꺼진 국회 의사당에서 가곡이 흘러나온다면 그것의 근원지는 대개 해리의 방이었다. 의사당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개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에그시는 오늘 처음 노랫소리가 가득 찬 해리의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무슨 일이세요?”
“앉게.”
해리가 제 자리에서 볼륨을 조정했다. 소프라노의 음색이 워싱턴 하늘에 깔린 달빛처럼 은은해졌다. 에그시는 도합 여섯 사람은 앉을 수 있는 소파의 어느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해리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는 그의 맞은편을 택했다.
“…시키실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나는 고용인을 감정 없는 하수인처럼 부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네.”
에그시는 해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내가 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네를 부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거지.”
“일 때문이 아니라고요…?”
“자네의 입은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내게 전해줬지. 이제는 그 전례들에 변화를 주어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자네의 내면을 들어보고 싶다는 뜻이네.”
불완전한 형태의 빛이 해리 하트의 한쪽 얼굴만을 비췄다. 에그시는 다시 한 번 그 곡선에서 자신의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싶은, 완벽하게 정돈된 야심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추진력과 마법 같은 지성을 찾을 수 있었다.
“왜 나를 선택했는지, 자네의 눈동자가 내 안에서 찾아낸 건 무엇인지.”
반쪽만 빛나는 해리의 모습은 오히려 완성되어 보였다. 에그시는 그 순간에 해리 하트가 가진 또 하나의 굴복시킬 수 없는 자질과 맞닥뜨렸다.
“나는 자네를 빌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지. 자네가 나를 빌려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에그시는 해리가 자신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지게 될 모든 것이요.”
⁂
어느 날 해리는 에그시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 자에 대해 알아봐주게.”
사진 속 주인공은 에그시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에그시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에그시는 사진이 찍힌 장소가 조지타운 대학교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름은 레이먼 오닐, 나머지 사항은 자네가 채워주면 좋겠군.”
해리의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에그시는 가만히 서 있을 뿐 사진을 가져가지 않았다. 남자는 아마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일 것이었다. 또한 그는 평범해보였고 조지타운의 악명 높은 기숙사비가 초래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에그시는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왜 이 사람을 조사해야 하죠?”
해리 역시 에그시의 물음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제껏 자네가 감당해야 하는 인물보다는 뒷조사를 하기가 수월할 거야. 그렇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만큼 자금을 대주겠네.”
“단순히 돈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당신 밑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해리의 눈동자가 천천히 에그시 앞에서 정지했다. 에그시가 해리 쪽으로 살짝 사진을 밀었다.
“이 사람 민간인이잖아요. 정당한 이유를 주지 않으시면 이번 일은 맡을 수가 없어요.”
“에그시.”
“…죄송해요.”
“난 자네가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날 위해 일해 주는 줄 알았는데.”
에그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그시가 맨 처음에 동경했던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 해리 하트는 지식만으로는 함양될 수 없는 날카로운 판단력을 발휘했다.
“날 사랑해서 지금까지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나?”
에그시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해리의 눈을 피했다. 그러나 에그시가 있는 곳은 해리의 방이었고, 그 안에는 에그시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몽블랑 만년필부터 에그시가 느낄 수 있는 해리 하트의 모든 것이 묻어 있는 코트도 있었다. 에그시는 어디에다 눈길을 둬야 할지 몰랐다.
“…제가 왜 당신을 위해 일하는 건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이유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도, 돈 때문도 아닐 거예요.”
해리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직감하면서도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도록 하지. 나가도 좋아.”
에그시가 도망치듯 방문을 열고 나갔다.
⁂
에그시는 그 후 국회 의사당 주변을 한 스무 바퀴쯤 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에그시가 밤중에 해리 하트를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늘 에그시를 기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에그시는 오늘 밤엔 해리가 집무실 안에 없을 지도 모른다 여기면서도 결국 의사당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문 밑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없었다. 에그시는 딱 한 번만 노크를 하기로 했다.
—똑똑.
“들어와, 에그시.”
그 말을 듣고 숨을 잘못 들이마신 에그시는 목젖을 누르면서 겨우 문고리를 돌릴 수 있었다. 해리는 오디오 기기의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여가수는 에그시가 모르는 언어로만 노래했다. 해리 하트가 지배하는 공간은 여전히 에그시가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책상 앞에 있던 해리가 일어섰다. 그가 음악을 껐다.
“그래, 에그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생겼나?”
⁂
미국에선 흔한 목조 주택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보통 체격의 성인이라면 충분히 건너뛸 수 있는 철제 울타리가 그들을 가로막는 유일한 방해물이었는데, 거의 군중 단위를 구성할 법한 사람들은 그걸 뛰어넘지 못해 안달이 난 표정들이었다.
마침내 집 주인이 나왔다.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쭉쭉 뻗었다. 해리 하트는 평소처럼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패션 잡지에서 매월 칭찬하는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해리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선 청년이 그를 위해 길을 만들었다. 에그시는 카메라의 각도를 피해 자신의 시야에 간신히 닿은 차기 대통령의 미소를 목격했다.
해리가 준비된 차에 올랐다. 그의 옆을 영원히 지킬 수 있게 된 에그시가 대신 차문을 닫았다.
- 로버트 펜 워렌(Robert Penn Warren)의 소설 <All the King's Men>이 바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