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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mics/숲뱃] On the City (For Rooana)

Jade E. Sauniere 2015. 2. 11. 11:15

- DC Comics Cinematic Universe, Superman/Batman

- Based on Christopher Nolan's Productions

- Written by. Jade


On the City







  해가 보이는 하늘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보풀이 살짝 일어난 가운을 입은 남자는 햇빛에 반짝이면서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눈가루들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이 막아줄 수 없는 차가운 공기가 남자의 발끝을 조금씩 차갑게 만들었다. 해가 있어도 빛보다는 바람이 강해 고개를 숙이게 하는 광경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취하고 있는 방향을 추상적으로 늘려본다면 그것은 지금 남자가 생각하고 있는 어느 장소와 꼭 들어맞는다. 실제로 고담 시티의 남쪽에는 메트로폴리스라는 도시가 있다.


  실내에서 눈을 맞는 재주가 있는 것처럼 남자의 어깨는 무언가에 눌린 듯 떨어져 있었고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정으로 즐기는 마음으로 사치를 해 본 적은 없기에, 그는 3년 정도 입으면 옷 아껴서 입는다는 말을 들을 법한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닳아지고 있는 옷감에는 힘이 없었다. 사실 남자가 종일 그 가운을 입고 방안을 깨작깨작 돌아다닌 지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찌꺼기를 털어내는 것처럼 눈이 두서없이 흩날렸다. 남자는 눈을 보면서 동시에 다른 하늘을 보았다.



  ⁂



  “메트로폴리스에서 여기까지 무슨 재밌는 일이 있다고 오셨는지 모르겠구만.”

  “재밌는 일만 기삿거리가 되는 건 아니죠.”

  

  고든은 메트로폴리스 출신이라고 하는 기자를 자신의 건너편에 앉혔다. 당연히 해야 할 아주 고전적인 행동이었지만, 고든은 속으로 영 자신에겐 익숙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기자들을 많이 만나기는 해도 경찰이 기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대개 사무실에 앉아 다소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든은 손님격인 기자보다 어색하게 착석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기자 양반한테 무슨 얘기를 해 줄 수가 있나 싶습니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강력 사건 얘기밖에 없는걸, 외지에서 온 사람한테 칙칙한 말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메트로폴리스의 기자라면 그 빨간 망토 휘날리는 남자랑 인터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 별칭이 뭐였더라….”


  “일단은 ‘슈퍼맨’으로 굳어진 것 같더군요.”


  “아, 그래. 슈퍼맨. 무식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사람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해요. 어, 사람은 맞나?”


  “사람처럼 생기기는 했죠.”


  기자는 살짝 웃는 낯으로 고든을 바라보았다. 고든은 분위기를 따라 순간 웃었다가 곧 표정을 굳혀버렸다.


  “저도 슈퍼맨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긴 합니다만… 정말 사람 맞냐고 물어보기도 해야 할 거고요. 그렇지만 음속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누군가를 섭외하기란 상상 외로 힘들더군요.”


  “그래서 나라고?”

  “말하자면 그렇지요.”


  “나는 슈퍼맨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을 한 명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에 대해 가장 많은 걸 아실 분일 것 같은데요.” 


  “오, 이런.”

  

  고든은 이번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배트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군.”


  고든은 한참동안 긴장된 입매를 풀지 못했다. 기자는 수첩이나 녹음기처럼 고든에게 압박감을 줄 만한 물건은 전혀 꺼내놓지 않고 그저 인내심 있는 얼굴로 고든이 말하길 기다렸다. 


  “그는 범죄자일세. 아직도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지.”

  “하지만 그가 벌인 소란보다는 그가 이 도시에 가져온 이득이 더 크지 않았습니까?”

  

  고든은 잠시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살인자를 가만 놔둘 수는 없네.”


  기자가 고든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고든은 또 다시 침묵했다. 정확히는 기자가 새로운 질문을 해서 억지로 대답을 생각해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도저히 말할 기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브루스 웨인의 저택은 이제 온갖 공식 행사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가 모두 사라진 이후 고담 시의 대부분은 지속되지도 보존되지도 않는 위태로운 구석들로 채워져 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그 속도 반 정도는 믿을 수 있는 장소들은 대법원이나 경찰청 정도였지만 주변에 천막과 단상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브루스 웨인의 저택은 홍보부처 공무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고든 청장은 벌써 세 번째로 브루스 웨인의 저택을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뜰이 아닌 곳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었다. 오늘의 행사는 그가 주인공이 아니었으므로 고든은 저택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겠다고 판단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잠시 후 고든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저택을 올려다보니 대부분의 창문이 캄캄했다. 고든은 다소 명랑해보일 정도로 호텔과 레스토랑을 누비던 브루스 웨인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고담 시는 어느 틈에 참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고든은 겨우겨우 잊고 있던 누군가를 상기시켜준 어떤 기자와의 만남을 돌이켜보았다.


  “배트맨이 누굴 죽였죠?”

  “마피아 하나, 그와는 별 연관성 없는 사람도 몇 끼어 있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죽였네.”

  “이 도시에서 가장 정의로웠다는 검사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고든은 기자의 말을 듣고 조금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차분하게 고든의 안색을 살폈다.


  “조커는요?”


  고든은 놀라서 반문했다.


  “뭐라고요?”


  “고담 시에서 가장 지독하게 활동했다던 범죄자 말입니다. 폭탄 테러는 기본이요 사람들이 탄 배를 인질로 삼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배트맨이 그는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래. 조커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지.”


  “배트맨이 자신의 가장 강력했던 적을 죽이지 않고, 도리어 자신과 협력할 수 있는 상대를 죽였다는 것이로군요.”


  고든은 점점 속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답답함이나 한심함은 아니었다. 고든이 힘겹게 물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뭐 속내를 알 수 없다느니 변덕이 심하다니 하는 사족 정도는 따라붙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배트맨이지 않습니까. 고담 시를 위해서 청장님만큼, 혹은 청장님보다 더 노력했던 사람 말입니다. 확실하게는 하비 덴트보다 오래 이 도시를 위해 힘써오기도 했었지요.”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배트맨의 진실은 살인자라는 아주 간단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그럴 수도.”


  고든의 음성에 숨소리가 섞였다. 

  

  “나중에 정말 운이 좋아서 슈퍼맨을 섭외할 수 있으면, 배트맨에게 대체 무슨 꿍꿍이였냐고 한 번 물어봐 달라 부탁 좀 해줘요. 같은 슈퍼 영웅한테는 털어놓을 지도 모르지.”


  스스로 그렇게 말해놓고 고든은 갑자기 메트로폴리스의 기자가 부러워졌다. 기자가 사는 도시에는 오해받지 않으며 햇빛 아래서 당당한 영웅이 있었다. 고든은 자신이 지키고 싶지만, 혼자 지키는 것보다는 동료가 있으면 좋을 듯한 도시에 사는 몇몇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끝까지 숨긴 채 기자를 보냈다. 


  고담의 낮은 평범했다. 밤 또한 멀리서 보자면 그러했다. 배트맨의 그림자는 언제나 자세히 살펴봐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든은 기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도시의 대로를 보다가 출입문을 닫았다.


  “길이라도 잃으셨습니까?”


  고든이 옆을 돌아보았다. 손전등을 든 알프레드가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기척을 냈다. 고든은 그가 저택을 빌려주겠다는 허락을 내주는 일종의 관리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뇨. 그냥…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행사장을 벗어나면 참 한산하군요.”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요.”


  알프레드가 신중하게 고든 쪽으로 걸어왔다. 고든은 불 꺼진 저택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정말 이 저택에는 웨인과 관리자님 둘만 사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넓은 곳에 두 사람만 산다니 좀 쓸쓸하겠습니다.”

  “사실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의 어려움이 있지요.”


  알프레드는 아무래도 고든이 행사장에 돌아갈 때까지 그의 옆에서 빛을 제공해주려는 모양이었다. 고든은 불완전하게 두 사람의 신발코를 비추는 타원형의 빛을 보면서 또 다시 무언가를 생각해버렸다.


  “당신의 도련님께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 얘기도 해보고 기대보기도 하라고 한 번 말해주세요.”


  알프레드가 고든을 응시했다. 


  “홀로 남길 자청한 사람의 마음에 비할 수는 없어도 주변 사람들 또한 힘이 빠지니까요. 그가 도움을 청하길 기다려야만 하니까.” 


  고든은 웃음도 찡그림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알프레드에게 인사했다. 고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알프레드의 얼굴 또한 만만치 않게 복잡했다. 알프레드가 불빛을 들고 있는 팔을 들어올렸다. 종종 행사장을 내려다보기도 했던 저택의 주인은 도시와 단절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꽁꽁 숨어 보이질 않았다. 알프레드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망토 입은 자는 깨진 전등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푹 꺼져버린 전등의 밑바닥에 철판을 얇게 다듬어 만든 박쥐가 고꾸라져 있었다. 


  그는 철로 만든 장식에 불과한 박쥐를 마치 사람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망토 입은 자는 아주 약간 전등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들고 가는 게 어렵지는 않겠지만 망토 입은 남자는 박쥐를 가져가는 것이 그야말로 버려진 박쥐 모양 물건을 구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망토 입은 자는 음속으로 구름 사이를 뚫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단지 답답한 사색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망토 입은 자는 자신이 이 세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것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한다거나 누군가의 조언을 받는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어쩌면 그런 점이 자신에게 쉽사리 망토를 걸칠 수 있는 힘을 주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추측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망토는 그도 몰랐던 새에 그에게 이미 선물로 주어졌던 것이었다. 


  망토 입은 자는 전등 밑바닥에 있는 박쥐 장식을 비롯하여 참 많은 걸 스스로 만들고 고민했을 누군가를 위하여 숨을 내쉬었다. 슈퍼맨이 책임질 수 없는 도시가 제공하는 공기였다. 





  본래부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던 브루스 웨인의 저택은 눈보라 치는 날씨에 신비롭게 떠오른 태양 덕분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표면의 색깔과 햇빛과 눈송이가 모두 저택을 반짝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 찬란함은 흡사 현실과 유리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마치 이 저택은 천사나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한 인영이 저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림자는 입구로 이어지는 낮은 계단을 오르면서 머리카락에 묻은 눈송이를 털었다. 


  —똑똑

  “계십니까?”


  한 방문객으로 인하여 사람이 사는 기척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던 현관에 발자국과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흩어지는 눈이 묻었다. 방문객이 구석구석 눈을 털어내는 사이 문이 열렀고, 알프레드는 처음 보는 안경 낀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어깨에 맨 가방에서 재빨리 명함을 꺼냈다. 


  “아, 안녕하세요. 데일리 플래닛의 클락 켄트라고 합니다. 브루스 웨인 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데요.”

  “데일리 플래닛이요?”

  “메트로폴리스의 신문사입니다.”


  알프레드도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빨간 망토의 영웅이 수호한다는 독특한 도시의 명칭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도련님에겐 메트로폴리스의 기자를 만난다는 일정은 없었습니다만.”

  “확신하십니까?”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만난 알프레드의 표정은 오히려 더 부드러워졌다. 기자가 멋쩍은 손짓을 휘둘렀다.


  “죄송합니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웨인 씨를 만나고 싶어서요. 그가 해야 할 말도 있고, 그가 꼭 들어야만 하는 말도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배트맨이라면 모를까, 브루스 웨인과는 거의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도시 출신의 기자가 하는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기자가 무엇을 아는지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기자의 태도는 상당히 진지했다.


  “도련님이 들어야 할 말이란 아마 그 쪽에서 맡을 것이니 그렇다 치고, 도련님이 해야 할 말이란 무엇입니까?”


  알프레드는 바깥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고, 그 덕에 저택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프레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나무 계단이 밟히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때 기자가 대답했다.


  “그의 속을 앓게 만들고 있는 것들이 여럿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꼭 제 도련님을 잘 알고 계신 분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도련님은 메트로폴리스에 가보신 적도 없는데요.”


  차마 땅을 보지 못해 하늘을 보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하늘을 볼 수도 없는 존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꼭 지역이 같아야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층으로 완벽히 내려올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춰선 브루스 웨인은 크게 굽어지는 난간을 잡았다. 알프레드가 엉거주춤하게 현관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켄트는 알프레드가 가리고 있는 풍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알프레드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서로가 감당하고 있는 정체성이라든가 의무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