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Ⅳ (The Final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6. 부재와 실재Absence and Presence
설리반은 마티의 얼굴을 몰랐지만, 나무에 기대고 서 있는 마티 하트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설리반은 큰 가방을 하나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마티가 팔을 들었다.
“꽤나 급하셨던 모양이군요.”
마티는 설리반이 짐을 넣을 수 있게 뒷좌석 문을 열면서 대꾸했다.
“그 쪽도 이 일을 대충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던데, 뭘.”
이윽고 마티가 앞서 걸었고 설리반이 그 뒤를 따랐다. 동부에서 온 FBI 요원은 흔하지만 울창한 남부의 숲을 유의 깊게 바라보았다.
“일단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게 뭐요?”
“별로요.”
설리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모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낯선 땅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러스트한테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으니까 내가 전화했을 때 곧장 온 게 아니었어요?”
마티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설리반을 돌아보았다. 반면에 설리반은 이상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태도로 응대했다.
“콜은 저에게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연락하면 얌전히 오라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마티는 하마터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연방 요원씩이나 되는 사람의 성격이 의외로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래서 러스트와는 대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가 위장조사를 하고 있을 당시에 만났습니다. 범죄 조직에 숨어들었으면서 FBI인 거 티내고 다니지 말라더군요.”
“러스트가 혼자서 알아봤다고, 그럼?”
“그러게 말입니다.”
마티가 숲의 그늘에서 햇빛이 있는 쪽으로 발을 뻗었다. 설리반이 재킷 한 쪽을 젖히며 총을 뽑아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수수한 저택이 드러나자 설리반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물었다.
“…저깁니까? 저기에 뭐가 있는데요?”
오히려 마티가 먼저 총을 쥐고 팔을 내렸다.
“나도 몰라요. 러스트가 미친 짓을 해서라도 버텨가며 알아내고 싶었던 게 있다는 거 말고는.”
탐정과 연방 요원은 천천히 우울한 망상이 창궐한 곳으로 들어갔다.
⁂
“아무도 없나 보군요.”
“마지막으로 있던 사람이 나가는 걸 확인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총은 들고 있는 게 나을 겁니다.”
마티는 고개를 한 바퀴 빙 돌리면서 주변을 훑었고 설리반은 입구에 버티고 있는 금속 탐지기를 곁눈질했다. 커튼이 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떠다니는 먼지를 비추었다.
“러스트는 여기에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고자 각성제를 먹고 다녔어요.”
설리반이 몸을 돌려 마티를 쳐다보았다.
“여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안정제를 먹이나 봐요. 여기까지 차에 태워올 때는 약한 수준의 수면제를 주는 것 같고. 그렇게 사람들을 약에 취하게 만드니 인류는 다 끝난다는 둥 그런 얘길 지껄이게 만들지.”
마티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방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문은 열어둔 채 각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마티가 들어간 곳은 도서실이었다. 마티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표정으로 천천히 방 안을 조사했다. 카운터마냥 입구와 가까이 붙어 있는 책상에 명부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마티는 그것부터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 때 설리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그런 생각이 꽤 인기를 얻고 있나 봅니다.”
“거긴 뭐가 있는데요?”
마티가 슥슥 파일을 넘겼다. 러스트의 이름은 없고, 대신 애나벨이 책을 빌려갔다는 기록이 많이 보였다.
“무슨 강연장 같은데요. 원형으로 배치된 테이블과 의자, 이동이 손쉬운 화이트보드도 있습니다. 그쪽은요?”
“여긴 책밖에 없어요.”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로비에 모였다. 둘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느라 잠시 말이 없었다.
“보통 중요한 것들은 꼭대기 아니면 지하에 있는 법이죠.”
설리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위쪽과 아래쪽 모두에 뻗어 있는 계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리반이 고갯짓했다.
“지하부터 살펴볼까요?”
⁂
병실에 들어와서 러스트는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간호사가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어디 불편하신가요?”
간호사는 직업적이지만 또한 자연스러운 눈길로 러스트를 본 반면, 러스트는 간호사를 자신이 원할 때까지 붙잡아야만 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전화기를 쓰고 싶은데… 내 소지품은 어디 있습니까.”
“아직 마취가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
“누워서 입 좀 벙긋거리는 건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부탁이니 전화기 좀 갖다 줘요.”
러스트는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팔을 움직였다. 간호사는 그에게 살짝 시선을 보낸 뒤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고, 러스트는 핸드폰을 건네받자마자 자판을 눌렀다. 간호사는 꽤나 다급해 보이는 그를 두고 병실에서 나갔다.
러스트가 가만히 숨을 내뱉으며 신호음을 들었다.
—러스트?
“마티, 어디야.”
—네가 노트에 남겨놓은 걸 보고 멜랑콜리안의 본거지에 왔어. 설리반도 왔고. 이제 깬 거야?
누구한테 전화가 왔냐고 물어보는 설리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러스트의 눈꺼풀이 조금 늦게 물러났다.
“네가 곧 발견하게 될 약물이 있을 거야. 그건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야. 마약상들만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곧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게 돼.”
—뭐라고? 확실해?
“바이스가 그걸 원해.”
러스트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설리반한테 도움을 구해. 빌어먹을, 멜랑콜리아의 성분 분석을 아직 안 했군. 샘플을 가져가서 분석해. FBI를 통한다면 그 자료를 가지고 제약회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거야.”
그의 귓가에 마티의 음성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마티가 설리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러스트는 순간 자신이 마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것만 아스라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러스트가 핸드폰을 놓았다. 무척이나 졸렸다.
⁂
“러스트가 약을 챙겨서 분석을 하랍니다. 놈들이 이걸 제약회사에 팔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둘은 어느덧 지하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끄트머리에도 전직 경찰과 현직 연방 요원을 미심쩍게 만드는 무언가는 묻어 있지 않았다. 마티는 양옆으로 총을 쥔 팔을 한 번씩 휘둘렀고 설리반은 주머니에서 얇은 손전등을 꺼냈다.
“마약 종류가 아니었습니까?”
“나도 모릅니다. 사람 정신을 빼 놓는 건 확실해 보이더군요.”
설리반이 비춘 길을 나아가기 전에 마티는 시간을 확인했다. 낯선 곳이었고 추가적인 지원이 없었으므로, 수색에 신중을 기하다가 시간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마티는 설리반에게 조금 더 빨리 움직이자는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다시 가깝게 붙어 섰다.
지하실조차 초반에는 평범했다. 여기저기 먼지가 끼어 있는 가운데 여분의 의자들이 포개져 쌓여 있었다. 화학 약품이라든가 조악한 실험 도구 같은 건 보이지 않아서, 마티는 그만 위층으로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설리반이 손전등과는 정 반대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콜이 저걸 말하는 걸까요?”
어딘가에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그것이 일종의 위장술인 것처럼 긴 목재 책상에 유리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티는 병의 밑바닥에 미세하게 어떤 가루가 가라앉아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샘플을 어떻게 챙겨가죠?”
증거물을 담는 봉투는 있었지만 작은 병까지 챙겨오지는 않은 설리반이 눈을 깜빡이며 마티를 돌아보았다. 마티의 해결책은 몹시도 확실했다.
마티는 지체 없이 유리병 하나를 들어올렸다.
“이제 어디서 성분 분석을 하면 좋을지나 생각해 봐요.”
“탐정 사무소라고 해서 그런 장비까지 있지는 않겠죠?”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젠장.”
“그럼 그런 장비가 있을 만한 곳을 가도록 합시다.”
설리반이 배지를 흔들었다. 마티는 그것 참 편리하다는 눈빛으로 앞서가는 설리반의 등을 바라보았다.
⁂
멜랑콜리안은 흩어졌다. 그들은 늘 흩어졌다가 모이는 족속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해왔던 자들은 아니었다.
아직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달팽이관을 달아줄 사도들을 파견해 놓고, 악이자 동시에 현자인 남자는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 이를 찾아갔다. 계몽되어야 할 대상은 완벽하게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얼굴을 들지 말아요. 많이 어지러울 텐데.”
러스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떴으나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마취제는 끈질기게도 그의 뒤통수에 붙어 있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상상이 갑니다. 감각기관의 신경과 대뇌가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약간 일방통행처럼 느껴질 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기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트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자신의 귀에 주입하듯 불어넣는 언어들을 떠안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냥 듣기만 해요, 러스틴.”
바이스는 안정감 있는 음성으로 러스트의 제대로 된 이름을 발음했다.
“일단 당신이 이런 꼴이 된 건 내 탓도 있다는 걸 알려주지요. 내가 당신한테는 약을 좀 세게 썼거든. 그런데 그렇다고 각성제를 먹고 다니다니,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요.”
바이스의 말에 살짝 웃음소리가 섞였다. 부드럽고 어떤 따뜻함마저 깃들어 있어서, 꼭 바이스가 부드럽게 소중하지만 말썽을 부리기 일쑤인 자신의 친구를 타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러스틴. 그래서 당신이 얻어낸 게 있었습니까?”
러스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익히 알려진 비관주의자입니다. 95년도부터 시작된 당신의 발자취를 찾는 것도 대단히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내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는 당신의 다른 파일까지 읽어봤다는 건 아닙니다만, 당신에 대해 알고 싶었던 건 다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많은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시작될 때 당신을 내칠 수 있기만을 바랐죠.”
바이스의 어투는 시종일관 온정이 묻어있는 형태를 취했다. 물론 그것이 러스트를 기만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러스트로 하여금 바이스를 비판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하던 작은 걸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완성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주 경계를 벗어난 바이스의 야망쯤이야 러스트도 잘 아는 바였다.
“잘 자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러스틴.”
바이스 또한 러스트가 잠이 아니라 꿈과 환영 속에 산다는 것마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러스트의 입술이 달싹였다.
⁂
루이지애나 주 경찰을 구석구석 꿰고 있는 사립 탐정이 연방 요원의 배지를 등에 업자 출입이 통제되는 방과 복도들이 허리케인을 만난 나무들처럼 쭉쭉 쓰러졌다. 설리반이 선택한 연구소의 직원들은 그의 얼굴만 봐도 무언가를 반드시 열어줘야 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티는 연방 요원과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종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진 방에는 이미 연구원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연구원은 마티가 통째로 내민 병을 살짝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40분 정도 걸립니다.”
설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과 한 방에 있는 건 옳지 않은 듯하여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그저 통로로서의 기능만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앉을 자리는 없었다. 마티와 설리반은 등을 벽에 붙였다.
“결과가 나오면 그걸 워싱턴으로 보내서, 루이지애나 외 다른 지역에 그 약이 퍼져나갔는지 아닌지 조사하게 만들 작정입니다.”
설리반이 조용히 있을 줄 알았던 마티는 조금 늦게 그의 말에 반응했다.
“…어, 그래요. 그래야겠지.”
“그 약이 벌써 시중으로 넘어갔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고. 수거할 수 있을 겁니다.”
마티는 고갯짓으로 설리반에게 동의했다. 설리반이 벽에서 물러나 마티의 표정을 슥 훑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군요.”
마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콜이 걱정되나요?”
마티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설리반은 굳이 음성을 내지 않아도 그의 행동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시선을 뗐다. 그러나 마티는 입술을 열었다.
“그 놈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그리고 서문을 열고 나자,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마티는 입술을 쉬게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한테는 목숨이 몇 개씩 달려 있어서, 그만큼 세상을 살아본 것처럼 떠들지만 러스트도 결국 사람이에요. 그나마 자기 인생에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는 단계는 지나간 것 같아서 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괴상한 머릿속을 다 이해하게 된 건 아니거든. 나는 러스트가 이 일에 왜 그렇게 충실히 몰입했는지 몰라요. 비관론자들끼리 한판 붙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일이 러스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건 확실히 압니다. 도라 랭 때도 그랬죠. 그런데 가끔 그럴 때가 오면 그 놈은 자신의 몸뚱이가 총알 한 방에 날아가고, 약 잘못 먹으면 터져버리는 그런 평범한 인간의 몸뚱이라는 사실을 뒷전으로 미뤄두는 것 같단 말입니다.”
설리반이 마티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마티의 말에서 자신도 전에 느꼈던 부분과, 자신이 미처 가져보지 않았던 관점 모두를 끌어낼 수 있었다.
“콜은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거기 얌전히만 있으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성격은 거지같지만 일은 잘 한단 말입니다. 능력 있는 수사관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설리반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당신이 콜의 파트너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 알 것 같군요.”
마티의 입가가 주름을 그렸다. 그는 뭐가 웃기냐며 설리반을 추궁하려 했으나 연구원이 불쑥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분석이 끝났습니다.”
⁂
러스트가 바이스의 이름을 소리 냈다. 바이스는 반쯤 돌아섰다.
“나는 이태까지 당신의 주장을 들었지.”
바이스는 진리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되는 것이라고 러스트의 말을 수정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바이스는 자신도 러스트의 주장을 들어줄 수 있는 만큼의 인내심은 있다는 듯이 자리를 지켰다.
“당신 말대로 도덕적 사실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적어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기관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꼬리표를 붙여주는 건 놀랍게도 인간의 몫이지.”
러스트는 조금씩 바이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약기운이 자신의 말과 함께 내뱉는 공기를 통해 배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러스트의 눈과 입술은 더 이상 멍청하게 정지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없는 것만 얘기하는군. 무엇이 실재하는지는 말하지 않아. 부재와 실재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은 늘 실재하는 것.”
“그게 뭡니까?”
“인간의 언어.”
러스트는 자유롭게 말했다.
“언어가 환상을 기술할 수 있는 것처럼 도덕적 사실에 구애받지 않고 도덕적 언어는 언제나 존재해왔지. 당신의 눈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어 보일 테고 많은 경우에는 나 역시 그런 말들을 개소리로 들어. 하지만 우두머리만 달라지면 그 모양을 바꾸는 법률과 어떤 사회적 윤리와는 달리 특정 언어는 역사적으로 그것이 영향력이 있음을 증명해왔어. 그건 도덕적 사실에 기초하지는 않아. 역사적인 사실이지.”
바이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러스트는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또한 그건 당신의 주장보다 위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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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진정한 비관주의True Pessimism
(The Finale)
기계들은 쉴 새 없이 불빛을 내뿜고 소리를 냈다.
빌 설리반은 어깨 위에 아슬아슬하게 핸드폰을 올린 채 팩스 머신에서 뽑혀 나오는 자료를 받고 있었다. 성분 분석을 끝낸 연구원은 사라진 상태였고, 설리반은 팩스로 도착한 목록을 보면서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공중으로 떠맡겨질 것 같은 종이는 마티 하트의 손에 안착했다. 마티는 목록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빌 설리반은 그들이 아주 늦지는 않았다고 단정했지만, 두 사람이 있는 힘껏 펼칠 수 있는 범위는 예전에 지나버린 듯했다.
설리반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마티는 그의 옆에서 한 손엔 워싱턴으로부터 도착한, 멜랑콜리아를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사들의 목록이 적힌 인쇄용지를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러스트 콜의 그림을 든 채 그것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티는 서서히 러스트의 그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리반이 손가락 마디를 내밀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는 자신이 이름을 모르는 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걸음걸이로 방을 돌아다녔다. 검사실 안에서 복사기를 찾아낸 마티는 러스트의 그림을 기계 안에 넣었다. 그림이 복사되는 동안 마티는 주변에 있는 종이를 찢었다.
“설리반.”
겨우 통화를 마친 설리반이 마티를 바라보았다. 마티가 메모지 크기의 종잇조각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이젠 흩어져도 될 것 같아서요. 그, 워싱턴 쪽에서 보내준 회사 명단은 어차피 우리가 못 가는 곳들이 태반이잖아요. 당신 동료는 뭐랍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히 깨달은 것 같더군요. 환각이라든가 기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효과가 크다는 분석 결과를 받아들었으니 말입니다. 담당 팀을 꾸리고, 각 지부들과 연합하여 약물을 회수할 겁니다. 우린 일단 루이지애나를 맡아야지요.”
그 말에 마티가 설리반의 손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흩어지자는 겁니다. 쪽지 안에 루이지애나에서는 규모가 크다는 회사들의 이름을 적어놨어요.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어요.”
마티는 러스트가 그린 얼굴의 복사본을 설리반 앞으로 내밀었다. 설리반은 손목을 집게처럼 아래로 꺾어 그림을 들고 눈을 들이댔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챙겨가요. 그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냐고.”
“당신은요?”
마티는 대답 대신 러스트의 그림을 팔락였다. 종이가 흔들리는 가벼운 소리와는 다르게 마티의 표정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
바이스는 다 헤아릴 수도 없는 개수의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의 조각은 텍사스에도 있었고 캘리포니아에도 있었으며 일리노이의 중심부에도 있었다.
그것들 모두는 어느 한 지점에 안정되어 있지 않고 진동하는 중이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아의 강력한 덫이 그를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 떨림이 빚어낼지도 모르는 일종의 불완전함을 고려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계산의 결과로 그는 러스트 콜을 위한 차가운 전령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바이스는 다시금 그것을 상기했다.
“허술하군요.”
바이스는 순간 움찔대려는 자신의 발끝을 엄하게 훈계했다.
“얄팍하고 추상적이며 심지어는 허상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특정 언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언어에 어떤 실체적인 힘이 있다는 거지요?”
“아주 근본적이고 친밀해서 인간에게 하나의 가족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말들이 있지.”
바이스는 러스트의 화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바이스는 일견 어떠한 형태도 없는 듯한 러스트의 어휘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러스트가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더 이상 긴 답변을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뒤이어 러스트는 두 번째 답을 주었다.
“그리고, 반드시 객관성에서 실체가 도출되는 건 아니야.”
러스트는 무표정하게 단언했다. 그는 드디어 논리에 사로잡혀 현실로부터 유리된 몽상가를 비판할 수 있었다.
바이스는 정지했다. 더 이상 질문도 해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이스는 러스트의 침대보다는 병실의 문과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지만, 복도 밖으로 나갈 것 같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러스트를 움켜쥘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환각으로 세운 파괴적 비관주의가 요동치고 있었다. 러스트는 바이스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러스트는 이불 속에 있는 손을 움직였다. 러스트는 그림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핸드폰의 빛을 불러들이고 그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실 그는 간호사에게 핸드폰을 받은 뒤로 그것을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었다.
핸드폰의 작은 구멍에서 수화음이 새어나왔다. 러스트가 조용히 볼륨을 내렸다. 전화를 받은 이의 목소리는 바이스에게 닿지 않았다.
⁂
인간은 도덕적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때론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 일을 설득력 있게 상상하게 만드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대개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마티는 러스트가 그림 속의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직관했다.
러스트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필사적으로 분석하고 묘사한 갈색 눈의 남자는 우울증을 휘몰고 다니는 핵심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저 멀리 뉴욕이나 워싱턴 D,C에서 큰일을 성사시키고 있는 중일 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티는 러스트의 다른 그림들도 같이 보았다.
해석 그 이상의 서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오직 그 갈색의 눈뿐이었다. 그 정도는 마티가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서 마티가 거침없이 속도를 높이는 와중에 벨이 울렸다. 마티가 핸드폰의 액정을 슥 보았다. 그는 핸드폰을 잡지 않고 정면을 보며 소리쳤다.
“나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 좀만 더 잡아놓으라고!”
마티의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
“다 때려치우고 병원으로 와요!”
—뭐라고요?
설리반의 목소리는 어쩐지 원치 않은 일이 반복되고 있어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러스트가 있는 병원! 탐정한테는 체포권이 없어요. 우두머리를 잡을 기회를 줄 테니까 꾸물거리지 말고 오라고!”
—젠장, 택시비 청구할 테니 그리 알아요!
설리반이 처음으로 내뱉은 험한 말에 자극을 받은 듯이 마티가 페달을 밟았다. 그는 설리반이 투덜거리면서도 주 경찰들에게 권위 있는 명령을 내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졌다. 혼란이 시작되는 것 같기도, 질서가 정립되는 것 같기도 한 공간 속에서 러스트는 바이스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스트는 조심스럽게 바이스를 추측했다. 그는 약물로 부식된 이성에 아주 최소한의 껍질만 두른 물컹물컹한 메시지를 심으면서 이것은 인간을 위한 또 다른 구원이라는 확신밖에 가지지 못한 자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악으로 칭하는, 자존심과 허영심 사이를 매 순간마다 스쳐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러스트는 바이스가 친절하게 자신의 실패를 알려주러 온 것이지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연 바이스에게는 총이 없었다.
바이스는 아무 것도 꺼내지 않았다. 러스트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바이스를 인내심 있게 응시해주고 있다가 피로감이 밀려와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의 일부가 아직 뻐근했다. 러스트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문지르면 한결 나아질 거라고 느꼈다.
러스트의 눈에 무엇인가가 내려앉았다. 그 때 러스트는 이불 속에 있는 팔을 꺼내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신의 진리는 적어도 날 위한 건 아닙니다.”
러스트는 본능적으로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부분을 가렸다. 바이스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세상 모든 종류의 환각이었다.
러스트의 팔에 달린 십자가 모양의 밸브는 세 방향으로나 열려 있었다. 러스트는 상체를 크게 일으키며 바이스가 자신의 혈관에 직접적으로 치사량의 멜랑콜리아를 주입하려는 걸 저지했다. 팔을 워낙 세게 움직이느라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던 바늘이 그의 피부 속에서 흔들렸다.
바이스는 비석 같은 표정으로 러스트를 우울함 속에서 질식시키려고 했다. 평범했던 그는 필사적으로 비범해졌다. 갈색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결국 러스트는 바이스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바이스의 동작을 묶은 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병실 안으로 들어온 마티였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꾸준히 높여온 가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마티가 바이스에게 달려들었다. 러스트의 팔을 꽉 잡고 있던 바이스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고, 덕분에 러스트는 애매하게 꽂혀있는 바늘이 부러져 그대로 혈관 속으로 들어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마티에 이어서 들어온 빌 설리반이 휘릭 수갑을 꺼냈다.
“음, 당신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의 죄목은 알고 있거든요.”
설리반은 범죄자의 눈앞에 FBI의 로고가 선명한 배지를 갖다 댔다. 마티가 설리반이 남자를 포박하기 쉽게끔 옆으로 비켜났고, 그러다 그는 러스트가 주삿바늘과 튜브를 내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어쩐지 러스트가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다는 듯해 마티는 날숨 섞인 실소를 흘렸다.
병실에 가둬놔도 무언가에 휘말리는 그의 파트너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
살짝 비뚤어졌던 침대도 본래의 위치를 되찾고 러스트의 팔에도 새로운 바늘과 튜브가 꽂혔다. 약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난 러스트는 자신의 처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서 마티는 술이든 담배든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은 무언가를 한 모금 들이키면 기분이 나아지겠다는 속내를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 중 마티가 먼저 풀리지 않은 문제를 한 번 해결해보겠다고 나섰다.
“뭐 좀 물어보자.”
러스트는 마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티가 말을 이었다.
“각성제 들이킨 이유가 혹시 그 노트에 적어 놓은… 지도랑 얼굴 때문이었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야 길도 외우고 사람도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 방법밖에 없었냐?”
러스트는 마티가 아직도 자신이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에 짜증이 나 있는 건가 싶어서 차근차근 대답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수준까지만 하려고 했어. 오차가 좀 있었을 뿐이지.”
“아니, 내 말은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내가 진짜로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적어도 마티는 무언가에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러스트는 까딱거린 정도였던 얼굴을 조금 더 움직여서 마티와 제대로 시선을 맞추었다.
“왜 네가 그 모든 걸 떠안아야 했는지,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그랬는지 알고 싶다고. 언젠가도 너는 이 일이 네가 해야 하는 거라고 말했었어.”
러스트는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과거를 끌어냈다. 러스트는 똑같이 진실의 위치를 점하는 말들에도 단계를 매기곤 했다. 그리고 러스트는 멜랑콜리안에 관하여 자신이 마티에게 모든 단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음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모두 솔직해졌다.
“의뢰인이 멜랑콜리안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 그걸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비관주의는 인간의 재앙이 아니야. 세상을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는 사고 체계가 아니라고.”
러스트 콜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는 순간이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무슨 의도로 그러한 말을 한 것인지 따져보는 걸 미루고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럼 비관주의는 어때야 하는데?”
“세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성찰을 행해야 하지.”
러스트는 그것이 자신의 비관주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옳아야 한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마티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이 러스트 콜은 난해함을 선택할지언정 거짓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고, 그래서 마티는 이것 역시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고 있다가 적당한 양의 시간과 그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을 거치고 나면 러스트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러스트는 기죽지 않는 빛에 깃발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마티는 전처럼 러스트를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밤이 찾아왔으나 그것은 특별히 어둡지 않았다.
2015. 01. 01 ~ 01. 27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