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History of Independence 10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0. Accidents
가판대에 꽂아져 있는 우주력 2259년 56일자 신문은 유래 없는 기하학적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1면에 실어도 아깝지 않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데에 관한 신문사의 대처법이었다. 네모난 파이 조각마냥 나뉜 신문의 첫 페이지에는 차례대로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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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이 테러 위험에 노출되다
모처럼 밝은 날씨를 맞이했던 런던의 오후는 다시금 어두워졌다. 런던에 위치해 있는 스타플릿 산하 캘빈 기록 보관소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서다. 폭발의 근원지가 지하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붕괴될 정도로 피해가 컸던 이번 사고에 대하여 조사 당국은….
칸은 정모를 눌러쓴 까무잡잡한 장교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 자리를 옮겼다. 남자가 자신의 요구를 똑바로 이행할 것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센티넬의 속셈을 간파해낼 리가 없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캘빈 기록 보관소 주변을 지나다녔다. 런던에서 유독 환대받는 햇빛이 예정된 폐허로 내려앉았다.
그는 자욱한 연기마저 물리치는 강인한 시력으로 보관소를 응시했다. 자신의 평화마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그에게 의심과 감시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칸은 나무토막마냥 무방비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지워내고 우뚝 솟은 기록 보관소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것은 곧 부서지고 말리라.
센티넬에게 예지력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칸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 관해 논할 뿐이었다.
캘빈 기록 보관소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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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플릿의 심장부 역시 안전하지 못했다
낮에 벌어졌던 기습적인 테러를 수습하기도 전에 스타플릿은 또 다른 비극을 맞이했다. 보관소의 폭발 사고와 관련, 대책을 마련하고자 데이스트롬 회의실에 모였던 스타플릿의 함장과 부함장 다수가 셔틀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서는 알렉산더 마커스 제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스타플릿에서는 캘빈 기록 보관소에 폭탄을 설치했던 장교의 메시지를 토대로 존 해리슨 중령을 두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타플릿은 그가 긴급 상황 시에 대령 급의 장교들이 회의실로 불려가게 된다는 공식 규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고, 조직적으로 테러를 벌인 동기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용의자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은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음을 듣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등진 유리창 너머가 기이하게 밝아졌고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 목에 힘을 주거나 탁자와 거리를 벌리는 이들이 늘어갔다. 불길한 달빛이라도 모여드는 듯했던 창문 크기의 하늘에 1인용 셔틀이 틀림없는 검푸른 형체가 나타났다.
“도망치세요!”
커크가 몸을 낮추자마자 통유리가 깨졌다. 그의 외침이 단번에 사람들의 비명 속에 녹아들었다.
첫 포격으로 겨우 통성명을 나눈 새 함장을 잃은 스팍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상관이기도 했던 커크를 보았다. 커크는 어느새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 경험상 그가 꽁무니를 빼고자 움직일 성미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스팍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 와중에도 벌칸의 발밑에는 브래드버리호의 함장을 위시한 시신들이 쌓여갔다.
그 때 스팍의 눈에 크리스토퍼 파이크 제독이 들어왔다. 스팍은 끊임없이 교차되며 데이스트롬을 어지럽히는 빔을 피해 파이크 제독 쪽으로 다가갔다. 파이크 제독은 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우선 밖으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파이크 제독은 스팍을 보고 잠시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독의 팔을 단단히 잡은 스팍이 벽을 따라 이동했다. 그들이 빔이 닿지 않는 곳을 살금살금 지나는 동안, 그들의 움직인 발자국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스팍은 파이크 제독을 무사히 구석으로 대피시키고 나서 하얀 벽면을 꽝꽝 두드리는 커크를 발견했다. 커크는 소방용 호스를 뽑고 있었고 그의 눈빛이 향하는 곳에는 폭격을 멈추지 않고 있는 셔틀이 있었다. 커크는 예상대로 정체불명의 적을 막는 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스팍은 그동안 한 명의 생존자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아수라장이 된 회의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제의 셔틀은 데이스트롬을 먼지 더미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근처에서 내부를 살피려던 스팍은 신발코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레이저 불빛을 보고 다리를 바싹 붙였다. 금이 가고 조각난 공간이 더욱 잘게 쪼개지는 소음 사이로 더 이상 신음하는 소리도 섞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쪽 다리를 어중간하게 접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커스 제독 역시 살아 있는 이들을 찾을 수 없는 음울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셔틀이 쏘아대는 빛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커스는 입술을 깨물면서 부서지지 않은 벽에 두 손을 붙이고 조금씩 옆으로 이동했다. 집착적인 레이저가 제독의 가슴팍을 뚫은 건 그 순간이었다.
움직이는 그림자를 목격하고 행동을 개시하려던 벌칸은 상처를 입고 스르르 내려앉는 마커스 제독에게 달려갔다. 두 갈래로 퍼부어지던 빛이 하나 꺾인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스팍은 주저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커크가 기지를 발휘해 셔틀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 모양인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팍이 마커스의 상처를 확인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출혈이 막심했다. 스팍은 말없이 죽어가는 제독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분하게 여기는 감정이 노출되고 있었다.
스팍은 제독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안타깝게도 스팍은 제 때를 맞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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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장에서도 폭발 사고
같은 날 오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개최 중이었던 제 36회 인간학 학회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인해 중단되었다. 지역 경찰은 수제 폭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가스 누수 등 일반적인 이유로 인하여 발생하는 폭발보다는 위력이 월등했다는 점 때문에 고의적으로 자행된 범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알렸다. 또 경찰은 사상자는 없었으나 사건 당시 강연을 하고 있던 스타플릿의 레너드 맥코이 소령이 실종되었음을 밝혔다. 현재 스타플릿은 앞서 일어난 두 사건과 소령의 실종에 연관점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레너드 맥코이는 여운을 남기며 흔들리는 종처럼 진동하는 머리를 털며 낑낑댔다. 그가 여태껏 무서워하고 있는 우주에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불편한 감각들이 온몸에 엄습해왔다. 레너드는 세차게 머리를 치켜든 다음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의 손과 발이 묶인 모습은 끔찍하기는 했어도 놀랍지는 않았다. 폭발이 터진 장소에서 사람을 언뜻 닮은 무언가를 봤었으니 몸이 멀쩡한 상태에 놓여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물건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의 신세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꼭 이삿짐처럼 뒤엉켜 있는 물건들은 기괴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사이언스 클래스에 속한 스타플릿의 장교에게도 낯설 정도로 이지적이었다. 레너드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팔만 몇 번 움직였다.
“대체 이게 뭐람….”
그가 작게 투덜댔다. 보기보다 묶여 있는 투명한 줄이 억세서 손목을 조금 비트는 것도 버거웠다. 주머니 안에 언제나 감돌고 있던 커뮤니케이터의 묵직한 감각도 사라진 지경이라 레너드는 입술만 비죽였다. 일단 납치범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 동기를 캐묻는 것 이외에 레너드가 할 수 있는 일는 없어 보였다.
문득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 레너드가 등을 곧게 폈다. 어둠 속에서 시계를 수색하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넋을 놓고 있던 시간이… 어?”
레너드는 갑작스레 눈앞을 떠도는 백금빛 입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전신이 입자에 휘감겨 있었다. 그의 도주를 봉쇄하기라도 하듯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던 물체들 역시 백금색 빛으로 반짝였다. 영문을 몰라 눈썹을 구부리고 있던 그는 이윽고 그것이 엔터프라이즈의 전송실에서 자주 보았던 트랜스포팅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뭐, 뭐야!”
당황한 레너드가 팔다리를 질서 없이 흔들어댔다. 물론 그것으로 트랜스포팅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수색대가 그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잡기도 전에 어딘가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커크의 방해로 존 해리슨 중령이 어쩔 수 없이 휴대용 트랜스포터 장비를 작동시킨 시점과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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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바깥에 사는 이른바 외계 종들 중에서 인류와 흡사한 축에 속한다는 클링온은 지구처럼 비옥하고 날씨 좋은 곳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클링온의 모(母)행성은 크로노스라고 불리는데, 자원이 바싹 메마른 땅에 인간들이 형성할 법한 도시와 부락이 곳곳에 갖춰져 있었다. 행성 특유의 모래폭풍과 건조한 번개를 이겨내고자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건물이 클링온들이 형성한 주거지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었다.
클링온들은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인 행성의 심술궂은 환경에서도 저마다 땅을 잡고 살아갔다. 그 생명력 강한 종족들은 케사라는 곳을 제외하고는 크로노스의 땅을 한 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물론 그곳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황무지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보다 몇 배는 사나운 바람과 천둥, 번개가 휘감고 있는 케사는 도저히 생명을 끌어안을 수 없는 장소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바로 그러한 곳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동굴을 연상시키는 석벽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자신이 범상치 않은 환경에 처박혔음을 알았다. 잔뜩 엉킨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워프에 소요되는 몇 십초 동안에도 묶인 손목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레너드는 가만히 앉아서 정면만 바라보기로 했다. 코끝을 불편하게 간질이는 공기나 벽의 질감을 고려하자면 이곳은 훨씬 낙후된 환경이었는데, 도전정신이 강한 과학자가 당차게 꾸며놓은 연구실마냥 갖춰져 있는 기계나 시설은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그걸 보고 레너드는 자신의 상식이 쓸모가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마침 옷자락이 사각거리는 옅은 소음이 그의 귓가로 다가왔다. 그는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이야? 스타플릿 장교를 납치한 죄는….”
레너드는 범죄자와 눈을 맞대고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바람을 막기 위해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레너드를 마주했다. 남자는 입을 놀릴 자격이 없는 저급한 생물을 보듯이 그에게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깨끗이 레너드를 무시하고 그와 같이 딸려온 짐들을 각 자리에 옮기기 시작했다. 레너드에게도 익숙한 유리 접시라든가 화학약품 등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저절로 그의 손바닥에 있는 주름 사이사이에 식은땀이 찼다. 레너드가 남자의 등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이봐, 날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은 해 주는 게 도리 아냐?”
“나는 실험체의 입술에서 샘플을 채취하진 않을 거다. 나한테는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유리 제품이 매끈한 표면에 놓이는 소리와 남자의 음성이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레너드는 그 날카로운 조화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잔혹한 표현에 눈을 크게 떴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 입을 도려내 바깥으로 던지겠다.”
레너드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실험 도구가 달그락대며 정리되었다.
레너드 맥코이에게서 완전히 뒤돌아선 칸은 이미 경고를 마치고 사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사고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험체였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위치에 선 것이었다. 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악독해질 것이었다. 그가 센티넬이고, 뒤편의 겁먹은 스타플릿 장교가 레비나스 맥코이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가이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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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잠에서 덜 깬 듯이 몽롱한 머리를 이고 눈을 껌뻑거렸다. 도심에서 떨어진 곳의 맑고 차가운 공기마저 그에게 협조를 하지 않고 안개마냥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커크는 숨을 위로 크게 내쉬었다. 숨을 쉬는 소리 정도는 다행히 주변의 우울한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지 않았다.
회의실이 습격당하면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함선 대여섯 개가 순식간에 함장과 부함장을 잃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제독들에게만 허락된 간부 회의장라든가 특급 라운지는 꽤나 오래 이용객들을 받지 못할 전망이었다. 이렇다 보니 알렉산더 마커스 제독의 장례식이라 해도 조촐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구실과 절차를 맞추기 위해서 왔던 장교들도 가 버리자 주변은 금세 적막해졌다.
흙과 풀로 덮인 제독의 마지막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응시하고 있던 커크가 눈동자를 돌렸다. 그에게 익숙한 회색빛 뒤통수가 고개 숙인 금발의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에겐 무척 다행스러우면서 어쩐지 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섞인 모습이라 커크는 결국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팍이 파이크 제독을 구출해낸 건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커크가 위안 삼고 있는 유일한 낭보였다.
관이 땅 속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만큼이나 어깨 위가 무거워지는 기분에 커크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옆을 감쌌다. 그 덕에 커크는 자신의 시야로 파이크 제독의 신발이 포착되었을 때야 겨우 허리를 폈다. 파이크 제독이 커크의 등을 두들겼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스타플릿 역시 맥코이 소령을 수색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될 거야.”
“아, 예. 물론이죠.”
커크는 일단 대답을 한 뒤에 머리칼을 매만졌다. 파이크 제독은 그가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 말고 무언가 더 이어질 게 있음을 눈치 채고 커크의 앞을 지켰다.
곧 커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본즈를, 아니 닥터 맥코이를 납치해갈 정도로 원한이라든가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에 대해서라면 자네가 몰랐던 게 있네.”
파이크 제독이 누군가에게 손짓을 보냈다. 제독의 부름에 응한 인물은 방금 전까지 그와 나란히 있었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걸어오면서 양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물기를 닦았다.
“이런 얼굴로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커크 대령님. 캐롤 마커스 대위입니다.”
하얀 피부 덕분에 그녀의 빨간 눈가가 돋보였다. 커크는 덩달아 눈 주변을 찡그리면서 캐롤과 악수했다. 사실 커크의 옆에는 스팍도 있었지만 뒷짐을 진 벌칸의 자세가 난공불락과 같아서 캐롤은 스팍과 눈인사만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존 해리슨이 맥코이 소령님을 데려갔을 거라고 봅니다. 그에게는 소령님 같은 분이 필요할 거거든요.”
커크가 단번에 안면을 구겼다.
“…뭣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 거죠?”
“센티넬에겐 꼭 가이드가 있어야 하니까요. 존 해리슨은 200년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강화인간, 즉 센티넬입니다.”
“해리슨이 센티넬이라는 건 어디서 얻은 정보인가? 대위 말처럼 센티넬은 200년 전에 봉인되었고, 그 뒤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어.”
금방 말이 튀어나올 것 같던 커크의 입술이 이리저리 꼬물거리기만 하자 스팍이 대신 물었다. 이에 캐롤이 눈꼬리를 살짝 찡그렸다. 대답을 고르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나온 표정일 테지만, 꼭 좁아지고 휘어진 그녀의 눈끝으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제 아버지가 그를 소개시켜주었고 저는 짧게나마 그의 가이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캐롤 대신 최고의 센티넬에게 선택받은 가이드는 온 구석이 저리는 몸을 끌어안은 채 자신을 방치하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납치범은 레너드가 입을 놀리는 것부터 꿈틀대는 것까지 그 어떠한 행동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였다. 레너드는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사지를 최대한 오므리고 피면서 혈액을 순환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던 와중 레너드는 엉덩이를 움직이다 옆에 서 있던 흉흉한 형태의 라이플을 건드리고 말았다. 무기가 돌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컸다. 레너드가 눈꺼풀을 찔끔대며 납치범의 검은 등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레너드를 돌아보기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친근한 주사기의 바늘이 반짝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눈동자를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싸늘한 분위기에 레너드가 침을 삼켰다.
“어….”
당황한 음성이 멋대로 새어나왔지만, 더 이상 목소리를 냈다간 가뜩이나 불편한 몸이 더욱 화를 입을 것 같아 레너드는 스르르 침묵했다. 남자가 앉아있던 의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레너드는 일어난 남자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있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피스톤 안부터 확인했다. 안은 비어있었다. 주삿바늘로 귓구멍이라도 찌르려는 것은 아닐까 긴장하고 있던 레너드의 눈앞을 점령한 남자는 말없이 그의 옷깃을 걷었다.
“뭐, 뭐하는 거야?”
남자가 든 주사기는 완고하게 레너드의 핏줄로 파고들었다.
“내 피는 왜 가져가는 건데!”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너는 실험체로 이용당하기 위해 여기 왔다.”
“…내가 왜?”
그것은 레너드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손과 몇몇 의학적인 솜씨를 제외하면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주삿바늘이 피부 밑을 찌르는 고통은 사라지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분석하길 원하는 의문이 범죄자와 장교 사이를 맴돌았다.
하얗던 주사기가 레너드의 혈액에 힘입어 붉어졌다.
“내가 어떤 존재인 것 같나.”
레너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듣고 싶은 거야. 납치범? 사람을 실험체로 쓰겠다는 사이코패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네가 내 연구에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자의 표현법은 기이했다. 사람과 올바르게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일평생을 무기질 속에서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남자는 안이 꽉 찬 주사기를 회수했다. 소독약이 묻은 거즈도 가져다주지 않아 레너드는 짜증이 난 얼굴로 소매를 내렸다. 꼭 자신을 씻을 수 없는 악연으로 여기는 듯한 남자의 불친절함에 서서히 눈썹이 꿈틀대던 참에,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던 범죄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본심을 고백했다.
“이딴 일방적인 관계는 하나도 반갑지 않아.”
칸은 자신의 지척에서 중얼대는 레너드 맥코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이드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안정을 한 번 맛본 육체는 200년 전보다도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되찾을 기억도 없는 센티넬은 끝내 가이드의 숨결과 멀어져 주사기에 담긴 두 종류의 혈액을 옮겼다.
칸이 레너드가 알아채지 못하게 시선을 잠시 뒤로 돌렸다. 레너드는 손발에 묶인 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드라고 센티넬의 심정을 헤아려 그들을 돕는 게 아니었다. 되레 가이드는 센티넬의 요구가 없이는 자신이 움직일 명분조차 찾지 못하는 아둔한 족속이었다.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상호교류는 없다.
칸은 도저히 그런 존재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실험 도구가 어딘가에 마찰하는 소리와 마른 폭풍이 치는 소리가 간간히 울려 퍼졌다. 가이드를 처음 만나기까지 소요된 2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센티넬이 단호하게 가이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현장은 그토록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