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zingSpiderMan/해리피터] Under
- The Amazing Spider-Man 2, Harry Osborn/Peter Parker
- Written by. Jade
Under
책상에 옆머리를 붙이고 있던 피터가 해리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 퇴근도 못 하겠네.”
“여기 누가 있다고 그래.”
“나 있잖아.”
해리가 힐끗 눈동자를 돌렸다. 피터는 눈꺼풀을 왔다갔다 움직이면서 해리에게 장난을 거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피터의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만 같았다. 해리는 책상을 붙잡고 앉은 채로 의자를 움직였다. 그와 피터의 간격이 더 좁아졌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좀 늦긴 했어.”
피터가 얼굴을 움직였다. 그는 이제 책상에 턱을 댄 상태로 특이하게 고개를 돌려 해리를 보고 있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예상을 빗나가네. 그런 말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일 수업 없어?”
“음…. 10시에 있어.”
“그럼 집에 가서 자. 학교는 가야 할 거 아냐.”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해리는 피터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기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러자 피터는 배시시 웃었다. 졸음과 장난기에 풀어진 입가는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아래로 고꾸라졌다.
“내 친구는 오스코프의 회장님이지. 그리고 그 회장님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착해서 친구가 굶주린 배를 붙잡고 골골대는 상황은 막아줄 것 같아.”
이름이 아주 긴 약물과 섞여 본래 빛깔을 잃어버린 혈액이 들어 있는 시험관이 꽂혀 있고, 공기 중에는 알코올 냄새가 돌아다니는 공간에서 목덜미에 끔찍한 흉터가 있는 청년을 대상으로 하기엔 퍽 찜찜한 농담이었다. 그럼에도 해리는 웃고 말았다. 그는 숙제 따위는 당차게 내팽개치겠다는 학생의 동작을 구사하면서 가웃을 벗어버렸다. 피터가 만족스럽게 킬킬댔다.
“내가 네 밥줄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지금?”
피터가 웃기만 하고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해리는 책상을 탁탁 쳐서 그가 허리를 펴게 만들었다. 해리는 발로 의자를 피터 쪽으로 계속 밀면서 그가 필요할 때만 발휘하는 오스본의 위엄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회의실에서 그보다 배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때 해리가 꾸며내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하나도 무게감이 없었다. 그 덕에 해리는 끝까지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려댔고, 해리는 두 손까지 동원해 피터를 압박했다.
“어디서 오스코프의 재산을 탐내?”
“에이, 네가 내 물건을 맘대로 빌려 써도 되는 것처럼 네 돈은 내 돈인 셈이지. 난 권리가 있다니까.”
“뭐라고?”
해리가 팔을 사용했을 때 그는 이미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상태였다. 그에게 붙잡힌 피터는 허우적거리는 시늉을 냈다.
“으악! 해리, 살려줘! 오스본 회장님이 일급 프로젝트에 필수적인 인재를 괴롭히신다! 절 괴롭히면 해리가 죽어요! 살려주세요!”
20대 청년들의 유쾌한 비명과 영악한 말들이 오고갔다. 바싹 메말라 있기만 했던 연구실에 어린 숲의 공기가 흘러들었고, 몇 분 전보다 훨씬 편안한 느낌이 나는 방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눈썹을 휘었다. 해리가 피터의 팔을 놓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진짜 집에 안 들어갈 거야?”
피터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지금 지하철 타면 종점까지 가 버릴 것 같아서 솔직히 걱정돼.”
“택시비 줄게.”
피터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오늘 친구를 너무 괴롭힌 게 아닌가 싶어 해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노동자가 받은 처우를 되짚어 보는 고용주의 모범적인 태도였다. 곧 해리가 피터를 톡톡 건드리며 한 제안은 피터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 오늘은 내 사무실 쓸래?”
이후 피터는 무서울 정도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스코프의 심장부에 들어섰다. 피터는 잠이 달아난 눈으로 도시의 야경과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가 감싼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피터가 만년필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보이는 뉴욕의 유명한 빌딩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갈 수록 그의 턱이 휘청거렸다. 해리는 피터에게 충분히 주위를 감상할 기회를 주며 캐비닛을 뒤적거렸다.
“그럴 줄 알았지. 없네.”
“뭐, 뭐가?”
워낙 대단한 정경을 보고 있던 피터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여벌옷 같은 거 말이야. 전에는 이렇게 늦게까지 회사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다음엔 여기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나 신발 좀 갖다 놔야겠다.”
여기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효용이 있는 건 유리잔과 술병이었다. 구름 낀 노을 같은 색을 가진 액체는 해리가 어렵게 청산한 버릇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해리는 조만간 사무실에 있는 물건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구경할 거야?”
피터가 홀린 듯 끄덕거렸다. 그렇게 해서 화장실은 해리가 먼저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소파에 먼저 몸을 붙이는 순서까지 이어져서, 피터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해리는 이미 한 쪽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서는 다음 날 새벽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터는 점점 밝아오는 하늘에 실눈을 떴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해리는 아직 일출의 영역에 들지 않았다. 피터는 몽롱한 얼굴로 통유리를 주황색으로 꽉꽉 칠하고 있는 태양의 부지런함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다 해리가 창문에 짙은 스크린을 입히는 걸 잊어먹고 먼저 잠에 든 탓이었다. 피터는 당연히 패널을 조작해 창문의 색을 바꾸는 방법을 몰랐으므로 햇빛을 참고 소파에 누운 자세를 고수하기로 했다. 피터는 덜 뜬 눈으로 태양을 한 번, 자신의 친구를 한 번 보았다.
태양빛을 거스르는 독액과 같은 초록빛이 해리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피터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목덜미의 상처는 초록색 피부에 묻혀버려 보이지도 않았고 전날 밤에 깨끗하게 감았던 머리는 지저분하고 고집스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피터는 급히 자신의 티셔츠 안을 들춰봤지만 그는 오스코프에 올 때는 스파이더맨의 옷을 받쳐 입지 않았다. 해리 오스본의 밑바닥까지 감싸줄 수 있는 친구 피터 파커로서만 이곳에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정한 두 사람의 규칙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피터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옳을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소파에 누운 이가 깨어났다. 이끼처럼 습하고 끈질긴 녹색 동공이 피터를 훑으며 느릿느릿 굴러갔다. 뒤이어 그것이 추한 이빨을 드러냈다. 해리의 음성을 억지로 흉내 낸 흔적이 역력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네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아?
피터는 그 말을 귀가 아니라 머리로 들었다. 동시에 그웬 스테이시가 그가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스파이더맨이 손목에서 뽑아낸 거미줄은 피터의 혈관에 기반을 둔 듯 그의 팔을 다 찢어가면서 아래로 뻗어갔지만 결국 그웬을 잡지는 못했다.
초록색 독이 퍼져갔다. 약품의 영향으로 보랏빛, 혹은 짙은 파랑색을 띠던 해리의 피가 오싹하게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그웬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해리는 색채가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피터가 세차게 몸을 뒤틀었다.
“해리, 안 돼!”
피터는 어느새 해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짐승의 것처럼 굵고 긴 손톱이 나 있는 손이었지만 피터는 일단 그것을 붙잡아야 했다. 거긴 원래 해리 오스본이 있던 자리였다. 피터가 상대방에 대한 죽음을 고려하지 않고도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지점이었다.
“…피터.”
피터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잡은 손은 햇빛을 볼 일이 많지 않아 하얀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해리의 손이었고, 피터의 이름을 부른 건 거짓을 찾을 수 없는 해리의 목소리였다. 재킷이 조금 내려간 위로 보이는 해리의 목덜미에는 흉터가 명백히 남아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
해리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면서 잠을 내쫓았다. 더불어서 피터를 염려하는 말까지 해주었다. 온 몸이 독으로 뒤덮여 있으며 이산화탄소 대신 신경을 마비시키는 가스를 호흡으로 내뿜는 괴물의 암록색 그늘이 걷힌 것이었다. 피터는 크게 안도하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별 일 없었어.”
피터는 그러면서 해리의 목을 빠르게 훑었다. 녹색 상처가 아주 살짝 뒤편으로 번져 있었다. 그것은 피터가 친구에게 발휘하고 있는 책임감이 모자라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