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Come Home (for Ev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2014/4/25
- Written by. Jade
Come Home
맥코이는 환영처럼 노을을 보았다. 깜깜한 우주에 언뜻 주황빛이 스친 것 같았다. 맥코이는 이 따뜻한 환영에 놀라 자리에서 가만히 있질 못했다.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환영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 데워진 찻잔 안에 파문 없이 담겨 있는 홍차처럼 달콤한 노을색이 아니라, 온갖 미지를 다 삼켜버린 검은 우주를 꿰뚫는 셔틀의 노즐이 내뿜는 따가운 하얀 빛이었다.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일렬로 배치된 침대에 누워 있거나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사람들을 돌봤던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에 힐끗거리기도 싫어하는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셔틀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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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오래간만에 자신이 우주에서 할 일이 생기겠거니 하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의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필요하지만, 사실 그들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수록 전체적으로는 이득인 게 사실이었고 근래 들어 엔터프라이즈호는 함장이 의무실에 들락거리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순항을 반복하고 있었다. 출항과 귀환을 네 차례 정도 반복한 항해 일정 가운데서 맥코이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개발지 탐사 목적으로 몇 십 명의 사람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외행성에서 자체적인 폭발 징후가 감지된다며 구조를 바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커크는 이를 눈을 반짝이면서 스타플릿의 소명 의식을 주창할 기회로 삼았고, 맥코이에게는 침상을 세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행성이 눈 깜짝할 새에 폭발하는 징조가 노을이라는 현지인의 정보는 승무원들에게 잠깐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그들은 외행성의 바깥 위성으로 나가더라도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게 폭발의 중요한 단서라고 귀띔했다. 한편 그들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얘기했다.
—그리고 오실 때 좀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예?”
—스타플릿이 가진 함선보다 더 성능 좋은 배가 어디있겠습니까만… 이 부근에는 우주 해적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규모도 꽤 크고 조직적이라서 함부로 우습게 볼 수 없는 놈들입니다.
커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지금까지 그 곳에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놈들은 이태까지 사람을 해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처럼 행성에 파묻혀 있는 광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 떨어지면 곧장 집에 웅크리고 있었죠. 놈들이 강탈해 가는 것들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면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스타플릿에 진즉 신고를 하셨으면 도움을 받았을 텐데요.”
—일종의 정보 유출 같아서 지금까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행성이 아예 날아갈 상황만 아니더라도 저희는 버텼을 겁니다. 여하튼 조심해서 오십쇼.
통신은 어쩐지 쌀쌀맞은 말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커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스팍에게 주변 행성에서 날뛰는 해적 무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조사해줄 것을 지시하는 한편 함 내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장교를 호출했다. 거주민들은 꼼짝없이 숨을 죽여야 할 지경으로 무시무시한 해적이었을지 모르나 커크는 태평했다. 그에겐 스타플릿의 최신형 함선과, 눈이 뒤집힌 벌칸이 겨우겨우 제압할 수 있는 강화인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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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가 눈치를 보면서 의무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환자는 아니었지만 일단 병상에 자리를 튼 외부인들이 슥 그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거뒀다. 간호사들은 함장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었다. 한 번도 커크를 보지 않은 건 맥코이뿐이었다. 커크는 발소리도 줄이며 슬금슬금 창가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있는 맥코이에게 다가갔다.
“항로를 바꿨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야.”
맥코이는 반응이 없었다. 커크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꼭 데려올 거라니까. 전송실하고 함교에서 눈을 부릅뜨고 레이더만 보고 있어. 칸이 타고 있는 셔틀이 보이기만 하면 통째로 모선으로 끌고 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본즈, 듣고 있어?”
맥코이는 이번에도 커크를 보지 않고 고개만 겨우 까딱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는 데에 관한 긍정인지, 혹은 한때 원수였던 인물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선언을 신뢰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인지 커크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커크는 맥코이에게 더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은 우주에 꽉 붙들려 있었고 달리 이야기도 생각나지 않아서 등을 돌렸다. 맥코이가 숨을 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커크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뱉는 소리만 났다.
커크는 나가기 전에 맥코이의 등을 보았다. 우주처럼 진하고 어두운 파란 셔츠가 아래로 구부러져 있었다. 커크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맥코이가 비공식적으로 겸하고 있는 직책은, 아무래도 전 테러리스트로부터 엔터프라이즈의 뒤통수를 보호하는 하나의 일방적인 안전장치가 아닌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던 맥코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커크는 함선이 곧 불바다가 될 행성으로 다시 접근하고 있다고 했지만, 바깥의 풍경으로는 함선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맥코이의 망막에 물기 어린 주황빛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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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내가 해적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거로군.”
칸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이 밤에 벌어질 것 같다는 예상안이 나왔으면 상관이 없는데, 계산상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시간대에 구조 작업을 벌여야 할 것 같아. 무슨 공납 받아가듯 규칙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니까 현지에서 날아온 제보는 맞다고 봐야겠지. 해적들까지 구해줄 의무는 없고 배에 태웠다가는 더 문제만 일으킬 수 있으니, 행성 폭발에 관한 사항은 놈들에겐 가급적 비밀로 붙이려고 해.”
“작전에 투입될 소형 함정은 내가 선택해도 되겠나?”
“물론. 혹시 보조 인력이 필요하지는 않고?”
이에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들에 대한 무궁무진한 복수심과 살해 욕구를 줄인 것만으로도 그의 입장에서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으니, 커크는 그가 인간을 얕보는 시선마저 지적하며 고치라고 압박할 수는 없었다. 커크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격납고 쪽에다 칸한테 문을 열어주라고 해줘.”
칸이 말없이 함교를 떠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
세상에게, 부디 네가 내 말을 듣고 있었으면. 혹시 내가 성급했거나 어린애처럼 구는 거라면 용서해줘.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의 더 나은 반쪽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그릇된 곳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그러니까 너에게 말할게. 돌아와. 내가 알고 있는 건 오직 너를 위한 싸움, 그리고 지금의 전쟁은 헛된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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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와 함교 사이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함장석에 앉아 있던 커크가 목을 뒤로 젖혔다. 특별한 임무를 쥐어주지 않는 이상 엉덩이를 떼려고 하질 않는 함선의 충실한 기관실장이 쌕쌕대면서 함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크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올려 스캇에게 인사를 건넸다.
“칸은 어딨어요?”
“방금 통신했어. 아직 행성 주변인 것 같던데, 왜? 아직 시간 있잖아?”
스캇은 거의 제자리에서 뛸 듯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굴렸다.
“그거야 그 행성 폭발이 일반적인 이유에 기인했을 때죠! 그런데 그 주변으로 지나가는 운석도 없고, 행성 내 에너지의 기류가 이상한 것도 아니에요. 한 마디로 보통 행성이 꽈광 하고 터지는 경우가 아니라는 소리죠.”
“그, 그럼?”
“중력 문제에요. 구제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행성의 중력이 근처 위성들과 씨름을 하다가 나 몰라라 하고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이러면 안정적인 비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훨씬 짧아져요. 칸을 불러와야 해요.”
승무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도 행성이 폭발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깊게 분석해보지 않은 듯했다. 예상 밖의 진실이 함교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가운데 커크의 대처는 빨랐다. 그는 곧장 셔틀과 연결된 회선에 대고 소리쳤다.
“칸, 작전 변경이야! 내 말 들려? 더 이상 해적들하고 노닥거리지 말고 거기서 나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귀환하라고!”
그런데 모선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없었다. 절대로 꾸물대는 법이 없는 강화인간의 침묵이 갑자기 커크의 뒷머리를 식혔다.
⁂
창가 앞에 앉아있는 맥코이의 무릎 위에는 패드가 있었다. 행성이 폭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재고 있는 타이머가 쉴 새 없이 숫자를 넘겼다. 사실 그것은 행성 내 거주민들이 엔터프라이즈로 무사히 옮겨 탄 지금에 와서는 효용을 다한 장치였다. 한 과학 장교가 임시로 만든 프로그램은 맥코이의 패드 안에서만 빛을 냈다.
빛은 몇 분간 그의 다리 위에만 존재했다.
그 때 맥코이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패드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면서 그는 패드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무릎을 바로 세웠다. 맥코이가 잡아주지 않은 패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는 간호사들을 잠시 신경 쓰이게 했지만 맥코이는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노을이 아니라 배 몇 척을 꽁무니에 단 셔틀이 나타났다. 맥코이가 의무실을 가로질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수석 의료 장교를 향해 아무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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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노을은 오히려 안개처럼 거추장스러웠다. 칸은 서둘러서 캄캄한 우주로 나갔다. 주황빛이 나는 폭발의 징조를 낭만적으로 여겼던 건 결국 갑판에 얌전히 양 발을 붙이고 있었던 다수의 승무원들이었다. 노을보다는 어둠을 찾아 나선 셔틀이 힘차게 출력을 높이며 선회했다. 끝까지 셔틀을 뒤쫓고 있던 추적 미사일이 서로 엉키면서 공중에서 터졌다.
평범해 보이는 수송선은 줄어들지 않는 속도를 자랑하며 해적들을 따돌리고 있었다. 또 셔틀은 이따금씩 곡예비행을 하면서 해적선의 측면을 때리고 사라지기도 했다. 해적들은 저 셔틀에 스텔스 모드가 장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물론 그들의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는데, 스텔스 모드를 남발하고 있다기에 셔틀은 지나치게 오래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칸이 탑승하고 있는 셔틀이 특별하다는 건 맞았다. 혼자 출격하는 일이 잦을 줄을 알고 그가 언젠가 격납고를 점령해버린 적이 있었다. 칸은 그 때 셔틀을 개조하면서 각 선체를 특정 목적에 최적화시켰다. 다대일 전투에 최적화된 수송선 한 대, 엔진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유인 및 탈출 작전에 쓰기 좋은 수송선 한 대, 상대 함선에 쇼크를 일으킬 수 있는 기능을 단 수송선 등등 격납고에 가만히 서 있는 소형 함정들만큼은 칸이 담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동료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강화인간의 유일한 무기이자 부하인 셔틀은 이 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노을의 영역을 벗어나자 엔터프라이즈를 찾는 일이 쉬워졌다. 칸은 자신을 구조하려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는 모선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셔틀이 위쪽으로 쑥 빠지면서 생긴 공간으로 끼어든 엔터프라이즈가 포문을 열었다.
우주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거대한 것이 폭발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 대신 강렬한 빛이 터지면서 무엇의 최후를 알리는 게 전부였다. 우주는 다시 까맣고 하얀 상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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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둘이 인사를 주고받을 겨를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맥코이의 뒤를 쳐다보았다. 이미 전송실에 한 번 다녀온 맥코이의 호흡은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의료 장교가 헉헉대는 숨소리가 복도에 길게 남았다. 셔틀이 정차하는 격납고까지는 아직 복도 몇 개를 더 지나야만 했다. 그동안 한 번이라도 침착한 자세로 숨을 고르지 않으면 그대로 늘어질 것처럼 맥코이의 입술은 하염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맥코이는 코너를 돌다가 다른 선원과 부딪힐 위기를 두 번 넘기고 계단을 훌쩍 뛰어내렸다. 환하게 불이 켜진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이 멀어져가고 우주의 빛깔을 닮은 격납고의 영역이 차츰 그에게 다가왔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주는 듯 맥코이는 잠시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은 체온을 가늠하기 어려운 강화인간이 이따금씩 내뿜는 냉기인지도 몰랐다.
과연 그 시원함 뒤에 맥코이는 격납고 중앙에서 칸을 만났다. 맥코이는 계속 달려오느라 뜨거워진 몸을 그대로 칸에게 돌진시켰다. 우주에 나가있는 동안 더 차가워진 강화인간이 뜻하지 않은 온기를 맞이했다.
셔틀을 들여보내기 위해 열렸던 격납고의 문이 천천히 맞물렸다. 묵직한 문이 철제 바닥을 끌면서 나는 소음 덕에 격납고는 조금 소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방식은 애초에 소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칸과 맥코이는 편안하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격납고 천장에 달려 있는 매입등이 작은 별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