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Sympathy for the Death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하도록.”
엄숙한 자비가 눈을 찌를 듯한 불빛을 뒤통수에 두르고 칸에게 내리꽂혔다. 늘 전범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심판대에 오르는 자신의 처지가 대단히 한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칸은 온몸이 전선에 묶인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300년 전에는 첨단과 잔혹함의 절정을 달리던 극저온 캡슐 앞에서도 입꼬리를 마음대로 움직인 경험이 있으니, 그에게 피부에 차갑게 와 닿는 죔쇠라든가 패드는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시간을 준 집행인이 물러났다. 칸은 유리로 가려진 위층에서 전범의 사형 집행을 참관하고자 착석한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인물들은 많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선원들이 간간히 보이긴 했다. 간부급들이 있는 대로 집합한 것일 텐데도 숫자가 많지 않은 모습과, 또 그것이 연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복수극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어 칸은 또 다시 웃었다.
“나는 오늘을 저주하겠다.”
죄인에게서 물러나 있는 집행인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 무기가 없으면 그 여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유리면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굳은 얼굴로 칸의 유언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칸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이용 가능한 가치를 지닌다. 칸은 끝까지 인간들을 유린할 칼날 같은 낱말들을 혀끝에 올렸다.
“이 날로서 나는 안타깝게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행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내 죄목이란 입에 담기도 거북할 정도로 무겁고 불쾌하겠지만, 300년을 살아 왔음에도 내가 미처 저지르지 못한 죄는 너무도 많다.”
칸은 현재 심장을 멎게 할 전기가 공급될 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혀와 입술이 새빨갛게 빛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가령 살육만큼 사악한 욕구를 인간 여성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는 일, 무고한 인간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놓고 유유히 그들을 비웃어주는 일, 너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들과 억지로 찢어 놓는 일, 그리고 그들을 조각내 저마다의 문짝에 걸어 두면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겠군. 오, 아직도 읊을 게 많군 그래. 일생을 바쳐 축적한 재물을 강변에 던지고 모든 인간들의 보금자리를 불에 태우는 일, 그 어떠한 눈물과 기도로도 잠재울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일.”
칸은 누워서 연극을 펼치는 한 명의 배우 같았다. 그는 자유롭게 음조를 조정하면서 자신의 잔인한 언어를 마음껏 강조했다. 두 손이 전깃줄과 연결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을 지도 몰랐다. 입술을 천천히 축이면서 칸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했다. 300년 전 캡슐 속에 갇힐 때는 이런 얄팍한 쾌감조차 없었다.
“너희들을 위한 불행과 음모가 이토록 많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를 다 이루지 못하니 오늘이 저주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칸은 눈을 감았다.
“이제 집행하도록 하지.”
그는 다른 사람의 사형을 진행하는 것처럼 말했다. 집행인이 유리벽 뒤편에서 침묵하고 있는 스타플릿의 권력층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집행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죄인을 사형시키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스팍이 입 주변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커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독과 대령들이 넋을 잃었다고 해도 예정된 사형 집행이 취소되지는 않으므로, 집행인은 굳게 닫혀 있던 쪽문을 열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내부가 어두워졌다. 집행인이 혼선을 막기 위하여 차단한 전등과 상관없이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누워 있었다.
강화인간의 심장을 영원히 정지시킬 스파크가 하얗게 번쩍였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2014/4/24
- Written by. Jade
Sympathy for the Death
시간은 흘렀다. 겉으로는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지만 저마다 머리를 굴리기 바쁜 사람들의 생각도 흘렀고, 전선을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뜨거운 번쩍임도 흘렀고 칸의 피도 마찬가지로 흘렀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의 몸 안에서 영영 굳어버려야 하는 피는 세상의 시간처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멈춰 선 게 없었다.
“젠장, 멈춰요!”
끔찍하게 일관되고 있던 흐름을 잡아 세우려 한 것은 커크의 목소리였다. 그 불빛만으로도 망막을 손상시킬 지도 모를 강력한 전류는 5분이 넘도록 칸의 몸에 주입되었다. 커크는 같은 곳에 앉아 있던 장교들만 놀란 눈치를 보이고 있자 강화유리를 쿵쿵 두드리면서 다시 소리쳤다.
“그만 두라고!”
커크는 아직 쪽문 뒤에 있어 자신을 볼 수도 없는 집행인을 향해 손을 사선으로 내리 그었다. 집행인은 용케도 그걸 접수하고 전류를 차단했다. 생명을 없애기 위해 타오르던 불빛이 사라지고 그보다 옅은 전등의 빛이 사형당하지 못한 범죄자의 몸뚱이에 내려앉았다. 커크는 그 때 재빨리 등을 돌려 칸을 보지 않았다. 그는 커뮤니케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칸은 얼굴을 움직여 내출혈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는 의자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스타플릿의 유력자라는 커크 함장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 집행을 중단하긴 했지만, 집행인은 그 이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전범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기만 했다. 모두가 쭈뼛거리는 동안 칸은 생명력 넘치는 쿨럭거림으로 목구멍에 걸려 있던 핏덩이를 뱉어냈다. 뭉친 피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인류의 심판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유래 없이 길게 진행된 사형 집행이었음에도 인간들은 그들이 합의 안에 하나의 시신으로 격하시켜버린 존재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장의사들이 아니라 구급대원들이 사형장으로 들어왔다. 죽지 못한 강화인간이 뿜어내는 냄새나 빛깔은 너무나 강렬했다. 구급대원들은 칸에게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선이라든가 살이 타면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상황을 파악한 듯 다소 질린 표정들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칸을 들것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잠깐 드리워진 그림자를 붙잡고 칸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구급대를 호출한 커크가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스팍이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장교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걸음을 걷는 법을 잠시나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
하필 그 날 레너드 맥코이는 스타플릿 본부의 의무실에 있었다. 구급 환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는 그를 자연스럽게 응급 병동으로 안내했다. 그가 본부와 가까이 있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거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면 맞닥뜨릴 이유가 없는 광경과 소란이었다. 맥코이는 구급대원들이 허겁지겁 침상으로 옮기는 환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사형장에서 이송해온 겁니다.”
구급대원 한 명이 눈치 좋게 먼저 말을 꺼냈다. 맥코이는 그 한 마디로 모든 걸 이해했다. 맥코이는 버릇과도 같은 투덜거림을 구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의사답게 환자의 환부를 살피지도 않았다. 맥코이는 입가만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 있는 칸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궁금해진 칸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맥코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신고를 하신 분은 커크 대령님이셨습니다. 아무래도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맥코이가 가만히 있자 구급대원은 사태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사형수가 집행 당일에 목숨을 건져서는 병실에 도달한 건 물론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구급대원이 주절대는 말은 맥코이의 귓가를 스쳐가기만 했다. 그 순간에도 칸의 눈은 기력을 되찾아 주변을 맑게 닦고 있었다.
조금 뒤 맥코이가 가위를 집었다. 그가 칸의 피부에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는 섬유 조각을 떼어내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거 참.”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게 나을 뻔했어. 아니면 아예 잘라버리던가.”
“23세기에 기요틴이 등장한다는 건 그래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전기의자에 앉아도 죽지 않는 놈을 어떻게 죽여야 한단 말인가? 살려둘 건 아니지 않나. 전쟁의 원흉이자 나아가서는 인류의 적인 작자를 말이지.”
“그 놈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히는군.”
습격 이후 구조를 뜯어 고치게 된 데이스트롬은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라 고위급 장교들은 라운지를 임시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계급에 따라 장교들 사이에 오가는 말씨는 달랐으나 그들은 한마음으로 사형장에서도 살아 나간 끈질긴 전범에 관해 입방아를 찧어대며 혀를 찼다.
“그런데 이건 좀 물어봐야겠어. 왜 아무도 제임스 커크를 막지 않은 건가?”
라운지에 있는 장교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남자가 불쑥 물었다. 자리 잡은 위치에 상관없이 이야기가 휙휙 돌아다니던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칸에게 구급대를 붙여주다니. 뒤늦게 생각해보니 좀 꺼림칙하더군.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만장일치를 해 놓고선 막판에 그를 살려준 셈이잖나.”
이에 갓 중령으로 올라선 청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 자는 5분이 넘도록 전류를 주입당하고 있었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동안 전선을 놈의 피부에 꽂아 넣고 있어도 안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들만 피곤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커크 대령님이 한창 집행되고 있던 법을 중간에 뚝 가로막은 건 사실이지.”
두 어깨를 으쓱하면서 중령의 발언에 자연스럽게 끼어든 그는 출항 경험이 많지 않은 함선의 선장이었다. 다른 장교들도 서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도 전기충격 한 번에 죽지 않아서 사형이 잠깐 지연된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칸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는 어떻게든 죽게 될 겁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적한데 별 게 다 귀찮게 구는군. 아예 이쪽에서 유전자가 조작된 인간을 쉽고 빠르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라도 해야 할 판이군 그래.”
“이쯤 되니 마커스 제독님이 그를 깨운 게 원망스러워 지는군요.”
솔직한 심정들이 툭툭 라운지 바닥에 떨어졌다. 대개 그들이 내놓는 말이란 피상적인 한탄이라든가 불평 혹은 언짢음이었다. 커크가 화를 내면서까지 칸을 응급실로 보낸 사건은 서서히 장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당연히 누구보다 그와 원한이 깊으면서도 그를 도와줄 구급대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커크의 속내에 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커크를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커크와 같은 배를 타는 승무원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호의 재조선 작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 외부로 흩어져 있는 커크의 승무원들은 필요한 때에 그의 곁으로 신속하게 올 수가 없었다. 그나마 커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스팍은 자신이 유독 자신 없는 분야에 머뭇거리고 있었고, 맥코이는 커크보다 더 착잡한 가슴을 문지르며 칸이 누워 있는 병실의 출입문을 지키는 중이었다.
⁂
[본즈, 자?]
[뭐야. 웬일로 문자를 하고 그래.]
[아니, 뭐…. 혹시 네가 잘 수도 있으니까.]
[안 잔다. 무슨 일이야?]
[…혹시 칸이 거기로 갔어?]
[안 그래도 내가 그 놈 있는 병실 앞에서 진 치고 있다. 듣기로는 네가 신고했다면서, 당연히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렇기야 했지. 아무리 봐도 그 놈이 도저히 거기선 죽을 것 같지가 않더라.]
[그 질긴 생명력에 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지. 괜히 참관한다고 갔다가 고생만 했겠네. 피곤할 텐데 안 쉬어?]
[별로 잠이 안 와서.]
[뭘 걱정하는데?]
[전에는 그래도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것 같더니, 지금은 아니라서.]
⁂
맥코이는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 커뮤니케이터를 가만히 들고 바라보았다. 잠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커크의 답장이 늦었다. 그는 커크가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기도 버거운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커뮤니케이터를 시야에서 치웠다.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물체마저 사라지자 맥코이는 그야말로 자리에서 정지해버렸다.
그는 사실 자진해서 스타플릿의 공공연한 적이 있는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눈꺼풀만 간신히 까딱거리고 있던 맥코이는 반갑지 않은 순번을 맞이하듯이 엉덩이를 들었다. 그가 수술용 장갑을 낀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커크가 동료의 수면을 걱정할 정도로 주변이 캄캄해지는 시각이라는 것은 임시로 병실의 주인 자리를 틀어잡은 존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납작하게 깔려 있던 침대의 이불이 조금 솟아올랐다.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인지, 애초에 잠들지 않았던 것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눈동자가 침상의 코너를 도는 맥코이를 쫓아다녔다. 칸의 옆에 선 맥코이가 주저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냈다.
이불 밑에는 새로이 돋아난 피부가 타버린 표면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광경이 숨어 있었다. 강화인간의 회복 시스템은 계산 끝에 치유가 불가능한 피부층을 다 떨어뜨리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맥코이는 하얀 살갗이 분별없이 죽어버린 피부마저 흡수하려는 걸 저지하면서 육체에게도 버림받은 피부들을 모아 버렸다. 의술 행위인지 억지로 베푸는 호의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행동이었다. 칸은 엔터프라이즈호 소속인 주제에 자가면역질환 따위를 걱정하는 듯한, 아니면 해가 뜨자마자 다시 형장으로 보내질 자신의 처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온갖 힘을 동원하는 듯한 의사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맥코이는 침대에 걸려 있는 차트에 짧게 메모를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담당의의 뒷모습이 무척 평범했다. 칸은 맥코이가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해가 떠서 자신의 침상이 흔들릴 순간을 기다렸다.
⁂
드디어 병실로 햇빛이 들어왔다. 칸은 몸을 뒤척여서 서랍장 위의 시계를 집었다. 군인이나 다름없는 스타플릿 대원들이라면 본격적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법한 시간이었다. 칸은 1분이 다 흐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
“맥코이 소령이 곧 회의실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커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커뮤니케이터의 플립을 휘릭 접어서 손으로 말아 쥐는 동작이 어쩐지 딱딱했다. 커크 이후로 말하는 사람이 사라진 회의실은 밤처럼 적막해졌다.
오래지 않아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칙적으로 소령에 불과한 맥코이는 이 회의실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맥코이는 입구를 지키는 장교에게 자신이 초대받은 경위를 소개한 다음에야 회의실에 발을 뻗었다. 낯선 제독이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는군, 소령. 좀 앉게나.”
맥코이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커뮤니케이터를 쥔 손에 집중하고 있던 커크도 시선을 올렸다.
“자네 함장을 통해서 상황을 전달받을 수도 있었지만 전문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네. 듣자하니 자네가 칸을 데리고 있다던데.”
“맞습니다.”
“칸의 상태는 어떤가?”
몇 초 전에야 쉴 자리를 제공받은 맥코이는 곧바로 제독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메디컬 센터에 실려 올 때만 해도 맥박이 불규칙했고 의식이 희미했으나 지금은 안정을 찾은 상황입니다. 피부 조직은 거의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는데 몸 안쪽에 관해서는 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파악이 될 것 같아 퇴원 허가는 내주지 않았습니다.”
“안쪽이라니?”
“전기충격을 당했으니 내장에 가해진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정확한 부상 정도를 파악하고 치료에 돌입해야죠. 겉면이 먼저 멀쩡해진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칸의 회복력이 담당한 부분이라 제가 설명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가 내장도 자체적으로 치유했을 수도 있잖나.”
맥코이가 잠시 눈썹을 올렸다.
“그랬을 수도 있지요. 칸의 능력에 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수입니다.”
부랴부랴 제복을 찾아 입은 수고가 무색할 정도로 이후 맥코이가 맡은 역할은 없었다. 제독은 시시한 질문 몇 개를 한 뒤에 맥코이를 내보냈다. 메일을 통해 올리는 보고서가 더 효율적이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맥코이는 자신의 직급과 권한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회의실의 무거운 문 가운데서도 특정한 지점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면 맥코이의 시선 앞에는 커크가 놓여 있을 자리였고, 지금은 회의실이 한 번 무너졌을 무렵에 그가 지었던 표정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준 젊은 함장이 주먹을 쥐고 있을 곳이었다.
회의실의 문지기가 멈춰 서 있는 맥코이를 힐끗거렸다. 맥코이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나가기 전 맥코이는 제독으로부터 공연한 수고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쉬라는 말을 건넸었다. 그러나 맥코이는 메디컬 센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지를 확정한 맥코이가 리프트에 탑승했다. 그 때 칸의 기다림은 결실을 맺었다.
⁂
유언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다져진 강화인간의 입술과 혀는 틈만 나면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려 했다. 자신이 웃음을 보낼 수 있는 참관객도 없는 가운데 칸은 긴 의자 위에 누웠다. 구불구불한 선이 달린 수화기를 든 집행인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집행인은 전류가 통하지 않는 곳으로 대피한 뒤에 지시대로 음악을 틀었다. 전자 기타 소리가 시끄럽도록 강렬했지만 집행인이 꽤나 좋아하는 곡이었다.
형장을 쳐다볼 수 있는 창은 커튼으로 가려놓았고, 귀는 볼륨을 한껏 높인 음악으로 막아버렸다. 집행인은 자신이 다섯 곡을 들을 때까지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집행인은 아무 것도 몰랐다. 전력을 높이는 버튼과 방금 전에 제독으로부터 받은 명령뿐이었다. 집행인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아는 대가로 끊임없이 달리며 고함을 쳐야 하는 제임스 커크가 출입구를 발로 차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
외부에서 열기를 내뿜는 스파크만큼이나 또렷해지는 고통 속에서 칸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는 죽음에 관한 막연한 상념보다는 자신이 첫 번째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를 돌이켜보고 있었다.
압력이 올라서 눈앞이 붉게 터져버릴 것 같던 순간에 칸은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들을 보았었다. 목덜미가 온전한 그들이 느끼고 있던 것은 경멸과 두려움과 거북스러움이 한데 뒤엉킨 복잡스러운 감정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속앓이를 하고 있는 볼품없는 풍경이 시계추처럼 대롱거리는 육체 안으로 흘러들던 것을 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칸은 구경꾼들이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혈관을 드러내며 눈을 번뜩였었지만 지금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는 아직 기다릴 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죽음일 수도 있었고, 죽음을 등에 업은 또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무한한 회상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것들은 모두 칸이 눈을 감아야만 찾아올 것들이었다. 번갯불처럼 넘실대는 전류를 바라보고 있기가 지쳐서 칸은 천천히 눈꺼풀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은 새에 집행장 안으로 들이닥친 건 레너드 맥코이가 끌고 온 들것이었다.
⁂
“함장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왔습니다.”
스팍은 자신의 호출에 응한 커크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들었다. 가벼운 질문으로 말문을 트려다 뜻밖의 문장을 안아든 커크는 눈을 껌뻑이면서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이 탁자 가운데에 패드를 올려놓았다.
“300년 전에 칸과 그의 무리들이 형을 받은 기록이 당시 언론이 발표한 자료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서기가 적었을 법한 문서는 찾지 못했습니다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커크가 의자를 끌면서 방향을 틀었다. 예전엔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는 종이 위에서 나풀거렸을 기사가 매끄러운 패드 위에 담겼다. 스팍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이동시키면서 중요한 부분을 몇 번 짚었다.
“마커스 제독이 전에 밝혔던 대로 칸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게 맞고, 실제로도 이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졌었습니다.”
“상황이 지금이랑 똑같네.”
“그렇습니다. 21세기에는 고압 전류를 사용하지 않았고, 보통 사형 집행이라고 하면 교수형에 처하는 방식을 따랐는데 이때에도 칸을 죽이는 데에 실패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목뼈가 부러지거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맙소사.”
스팍이 패드 위에 다른 창을 끌어왔다.
“300년 전만 해도 사형 집행이 실패했을 경우 이를 번복하지 않는 게 전통적인 판례였다고 합니다. 어떤 논리를 통해 도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을 매달아서 죽지 않는 죄인은 거의 없었으므로 판례로 하더라도 일종의 전설처럼 남아 있는 항목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사회가 대단히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전범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결국 못 죽였잖아.”
“한 마디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사형이 불가능했으니 죽음과 비슷한 가사상태로 몰아가자는 것이지요.”
스팍이 조작을 멈춘 패드의 디스플레이는 하필 자극적인 표제를 띄워 놓고 있었다. 커크가 가만히 패드를 바라보았다. ‘죽는 게 불가능한 사형수’라는 표현은 가슴이 답답할지언정 쉽사리 반박할 수는 없는 어려운 말이었다.
“칸이 법정 공방이 아닌 그의 육체적인 특성으로 사형을 한 번 피해갔다는 건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이걸 이용한다면 함장님의 의견을 제독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피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서 스팍은 아무렇지 않게 패드를 회수해갔다. 다양한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하는 건 언제나 커크의 몫으로 남았다.
“…용케도 알았네. 사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를 풀어주자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죽지도 않는 자를 계속 죽이려 드는 행위처럼 무모하고 소모적인 일도 없습니다.”
스팍은 자신의 함장을 죽였으나 또한 살리기도 한 장본인이라는 칸과의 복잡한 관계를 이성적으로 일축해버렸다. 의자에 수없이 매달린 전선에 불꽃이 번쩍할수록 짧아지는 함장의 인내심과, 타다 만 범죄자를 매번 받아드는 맥코이의 수척한 얼굴이 스팍의 머리를 오히려 차갑게 식혔는지도 몰랐다. 커크는 아랫입술을 속으로 감추고 한참을 앉아 있으면서 스팍의 말을 곱씹었다.
충분히 숙고한 끝에 커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거 어디서 구했어?”
⁂
“…어, 그래. 괜찮아. 또 알아서 일어나겠지. 너야 말로 숨 좀 돌렸어?”
죽음이 뚝뚝 묻어나는 추억에서 칸을 건져 올린 건 지극히 일상적인 낱말들이었다. 칸이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목소리를 작게 내느라 허리까지 구부리고 있는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등은 의사의 가운을 입어 하얬다.
“정말 괜찮다니까? 벌칸보다 더 말 안 통하는 사람들 틈에 있는 네가 더 고생이겠지. 솔직히 난 여기서 별 거 안 한다고. 응, 알았어. 너나 잘 챙겨.”
“네 함장은 여태껏 이리저리 참견하는 성미를 못 버렸나 보군.”
맥코이는 놀라서 몸을 홱 돌렸다. 칸이 지나치게 빨리 깨어난 탓도 있었지만 맥코이는 또 다른 이유로 눈을 크게 떴다.
“짐인 줄은 어떻게… 아니, 됐다.”
맥코이는 다리만 살살 움직여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병실을 돌아다녔다. 의사의 권위는 전혀 돋보일 구석이 없는 행동 양식이었는데도, 모니터를 차분하게 읽고 있는 그는 반박할 여지없이 의사로 보였다. 괜찮다고 쾌활하게 둘러댄 입술이 축 가라앉는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 책임감 있는 담당의의 숨결을 담고 있었다.
“왜 인간들이 버거움을 호소하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이야?”
“인간들은 의자에 묶이지도, 공중에 목이 매달리지도 않는데 말이지. 눈엣가시 같은 적이 통쾌하게 사리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누가 네 놈이 안 죽어서 힘들다고 그랬나.”
일직선으로 침대에 몸을 묻고 있던 칸이 상체를 조금 들었다.
“박사는 아닌가?”
“다리 운동 좀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뭘 힘들다고 불평해. 네 말대로 의사로서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답변이 조금 엇나갔군. 나는 비단 육체적인 피로에 한정하여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굳이 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맥코이는 강화인간의 사고와 발맞추는 속도로 척척 대답을 내놓았다. 의사는 어떤 윤리적이고 감정적인 지끈거림에 시달리지 않는 듯한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죗값을 치룰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솔직히 네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는데? 기껏해야 약간의 앙심이나 복수심 따위를 충족시켜 줄 뿐이겠지. 나 같으면 너처럼 튼튼한 놈은 사막에 던져놓고 오아시스를 파라고 시킬 거야.”
사실 맥코이는 반쯤은 농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도 300년 동안 단단하게 얼어붙은 적대감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을지 추측할 수 있는 감각은 있었다. 그런데 칸은 맥코이가 남들에게 드러내는 태연함을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끌어와 자신을 달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걸 간파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이 없었다.
칸이 대화를 이을 생각이 없어 보여 맥코이는 그만 병실에서 나가기로 했다. 맥코이가 물러난 의자가 조금 흔들리면서 옆으로 돌았다. 의사는 깊고 한가한 걸음걸이로 발을 내딛더니 곧 모습을 감추었다.
⁂
병실은 조용해야 마땅한 곳이다. 맥코이는 자신도 휘말린 거대한 사건 속에서 커크가 얼마나 불평을 하는지, 가뜩이나 딱딱했던 스팍의 표정이 화석으로 변해버릴 것처럼 갑갑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등 그가 접할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들을 병실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함장보다 열 배는 더 날뛰는 기자들의 말은 메디컬 센터의 마당에서 일찌감치 버렸다. 전범 한 명 사형시키자고 샌프란시스코가 전력난에 시달려서야 되겠냐는 우스갯소리 역시 병실의 창문을 뚫지 못했다.
맥코이가 칸의 병실로 들고 오는 소리는 오로지 그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이따금씩 전화가 걸려 와서 ‘맥코이입니다’ 혹은 ‘무슨 일이야?’ 같은 상투적인 말을 할 때 말고는 입술도 제대로 달싹이지 않았다. 칸은 침대와 모니터 말고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고 있는 의료 장교를 간간히 깜빡임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맥코이는 칸이 물어보기 전까지는 그가 언제 다시 죽으러 형장으로 끌려갈 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맥코이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칸은 침대에서 벗어나 주로 문병객들이 이용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맥코이는 눈썹을 꿈틀했지만 그가 침대를 이탈한 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칸의 상태는 너무도 멀쩡해서 당장에 문을 뚫고 스타플릿의 헤드쿼터로 돌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맥코이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맥코이는 바이탈 모니터도 건성으로 힐끗거렸다.
조용한 병실 가운데서 맥코이의 커뮤니케이터가 전자음을 냈다.
“아, 짐.”
그러자 맥코이가 제임스 커크를 부르길 기다린 것처럼 칸이 말했다.
“왜 너와 네 함장은 나를 사형장으로 보내지 않고 일을 키우는 건가?”
커뮤니케이터를 귀에 대자마자 맥코이는 다시 통신기를 들고 있던 팔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맥코이의 커뮤니케이터가 그의 턱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뭐라고?”
“이 병실의 목적은 며칠 전에 이미 퇴색되었다. 아무래도 네가 제임스 커크와 주치의의 권위를 들먹이면서 나를 여기에 붙들어두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네놈들도 나를 죽이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번거롭게 기한을 늦추는 거지?”
—음? 왜 그래, 본즈?
커뮤니케이터가 접힘과 동시에 커크의 목소리는 멀어져, 이제 맥코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소파 위에서 죽음 말고는 그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생각하기 싫은 듯한 얼굴을 짓고 있는 칸의 눈동자였다.
“죄수를 사형시키는 게 인간들에겐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앞선 질문에 관해서는 대답을 빠르게 지어내지 못하던 맥코이는 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세차게 눈꼬리를 굽혔다.
“누구를 죽이는 건 예상 외로 쉬워. 젠장, 아무데서나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맥코이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형식적으로나마 병실을 돌거나 칸의 이모저모를 살폈던 의사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짜증을 표출하는 데 집중했다. 쿵쿵대며 방을 나가버린 것도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맥코이가 씩씩대며 남긴 음파와, 우주와 지상을 누비며 활동하는 의사로서의 경험이 깃들어 있는 듯한 한 마디가 병실 안을 잠시 소란스럽게 했다.
칸은 일 분 정도 출입구를 보다가 뒷목을 소파에 기댔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죽음이 조금 더 빨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새벽인지 아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진하고 차가운 하늘이 칸의 등 뒤로 만연했다. 상체를 세우고 눈만 감고 있던 그는 쉽게 시야를 닦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와는 전선이 아니라 영양제가 흐르는 튜브로 이어진 유일한 의사가 바늘이 반짝거리는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칸은 주사기 안에 어떤 약물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 주사기의 내부를 물들이지 않는 약물은 너무나 흔했다. 칸은 아마 그것이 진정제거나 근육 이완제의 일종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든지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할 첫 번째 관문임을 확신했다.
시작이 일어나지 않은 순간과 이미 벌어진 순간 그 언저리에 위치한 애매한 빛이 병실 안을 침투해 칸의 정수리와 그의 팔과 그에게 접근 중인 주사기를 비추었다. 칸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두꺼운 피부를 꿋꿋이 뚫고 있는 바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늘의 위쪽에는 빛이 닿지 않았다. 의사의 손만 서늘하고 하얀 공간에 잠깐 머물고 있었다. 칸은 의사의 정체보다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레너드 맥코이는 자신의 눈동자를 내어주면서 칸을 깊은 잠으로 몰아넣었다. 맥코이가 주사한 것은 수면제였다. 효능이 강력하긴 해도 치사량에 달하지는 않아 정말로 칸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만들 약이었다.
맥코이가 침대의 양옆을 대충 정리했다. 모니터가 꺼졌고 빈 비닐 팩이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맥코이는 환자가 반쯤 누워 있는 침대를 서서히 밀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커크가 맥코이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자신을 운반하는 이가 주치의라는 걸 알았다면, 칸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길고 아득한 잠에도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을 터였다. 하지만 맥코이가 영리하게 배합한 수면제는 맥코이에겐 여유를 줄 것이며 칸에게는 그저 백지와도 같은 잠을 선사할 것이었다. 마지막에 중요한 진실을 다 움켜쥔 맥코이는 동행을 자처한 커크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에 맥코이는 침대 앞으로 쑥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후 맥코이가 민 침대 위에 칸은 똑바른 자세로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