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History of Independence 05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5. 역사적인 증언
대륙은 삽시간에 먼 과거로 돌아간 듯 한산했으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춥고 외진 구석에서 바짝 기를 죽이고 숨만 내쉬던 이들이 마침내 볕으로 나왔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게 된 임시 연합체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인명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일단 출생지를 기준으로 남은 인구를 배치했다. 다방면에서 나타난 피해를 측정하고자 조사단이 부지런하게 움직였고 침략을 받지 않았던 타국으로부터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했다. 전 세계를 대신해 상처와 영광을 떠안은 유럽은 눈물 어린 갈채를 받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그 복잡하고도 버거운 찬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대학의 연구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모국인 영국은 제일 처참하게 부서진 곳이었으므로 복구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무엇보다 캐서린은 이곳에 붙잡혀 있는 강화인간들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또 다시 견디기 어려운 과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강화인간들이 2년 8개월을 머물고 있었다는 독일의 연구소에서는 보고서 한 장 건지지 못한 데다, 포로로 잡힌 강화인간들이 자꾸만 자살을 시도하는 난감한 상황까지 겹쳤다. 평소라면 절대로 통하지 않았을 수법들이 강화인간들의 치유력을 넘어서 그들의 목숨을 속속 강탈해 갔다. 이러다간 전범으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받아야 할 강화인간들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책상을 한 번 세게 두드린 캐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집중 치료를 위해 스스로를 꿈속으로 밀어 넣었던 칸의 의식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몸을 뒤틀었다. 작은 바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고 거기에 평범한 딸각거림이 덧입혀졌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고 느닷없이 들어온 빛과 그림자를 맞이했다.
캐서린이 감들어와 그의 팔을 잡았다. 칸은 피곤했으며 전쟁터를 벗어난 캐서린이 문득 지루해져 저항하지 않고 오른팔을 내주었다. 캐서린이 칸의 소매를 걷고 윗부분에 굵은 고무줄을 묶었다. 곧 물기 어린 차가운 조각이 슥슥 피부를 닦는 감각이 느껴졌다. 너무도 익숙한 과정이 감옥 안에서 자신을 잡아넣은 여인에 의해 펼쳐지고 있자, 칸은 기어코 웃음을 이기지 못했다.
캐서린은 꿋꿋하게 칸의 핏줄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고 그것을 가져온 수액 팩과 연결했다. 파괴된 센티넬 스파이럴을 되돌려 놓는 방법은 캐서린도 알지 못했기에 일단 영양제라도 주입해 두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칸이 폭주하여 자살해 버리는 일은 막기로 결심했다. 칸은 그녀에게 알려줄 것도 많았고 처벌받을 것은 그보다도 많았다.
“당신이 내 담당의 같군.”
고무줄을 푸는 그녀에게 칸이 말을 걸었다. 캐서린은 튜브에 들어가는 수액의 속도를 조절하는 데 몰두했다.
“바늘은 알아서 빼도록 해. 거즈는 두고 가지 않을 거야.”
“캐서린.”
캐서린은 칸의 음성에 대고 고개를 내저었다.
“증언 도중에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주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언제 재판에 올리는 게 좋을지 재고 있거든.”
“여기 와서 내 동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낮아진 목소리가 조용히 자신의 의도를 털어놓았다. 동시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 칸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오필리아의 원수이고 작품이고 그녀의 마지막 추억에 캐서린은 별 수 없이 호의 하나를 내던졌다.
“…얼마 안 남았어.”
캐서린이 호위 대원들과 함께 감옥을 나갔다. 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둘은 예상보다 서로를 오래 마주보아야 했다.
⁂
이틀 만에 강화인간 네 명이 숨졌다. 남아 있는 강화인간들은 열다섯이었고, 이들 역시 스파이럴이 회복되는 것보다 정신이 붕괴되는 속도가 빨라 언제 자살을 감행할지 몰랐다. 구실이라도 제대로 잡으려면 살아 있는 강화인간들이 예외 없이 재판을 받게 해야 했는데, 시간을 더 주었다가는 아예 재판을 열지도 못할 거라는 괴상한 불안감이 지도자들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전후 강화인간들을 담당한 주제에 애써 잡은 포로들도 지키지 못했던 캐서린은 자진해서 발언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회의체는 칸을 강화인간의 대리인으로서 세우고 단 한 번의 선고를 내리는 방식을 택했다.
⁂
강화인간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걸쳐 본 적 없는 재킷이라는 걸 양 팔에 끼웠다. 양 갈래로 늘어진 긴 옷소매는 강화인간의 눈길로 보자면 무언가를 꽁꽁 싸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센티넬 스파이럴이 끊어진 자국은 바깥에서 보이지 않고, 캐서린이 마지못해 찔러 넣었던 영양제의 흔적은 바늘을 빼는 순간 사라졌는데 말이다. 칸은 다만 조금 피로했고 전장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주는 옷을 입었다. 넥타이는 없었지만 재킷을 걸친 것만으로도 법정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났다.
성미가 호들갑스러운 인간들 전부와 그보다도 많은 인간들의 귀가 보이지 않게 모두 연결된 단상이 칸의 자리였다. 칸은 거추장스러운 사슬을 끌면서 증인석에 섰다.
“증인은 간단히 자신의 신원을 밝히시오.”
칸은 순간 그것이 너무 인간답게 느껴졌다. 인간다운 것은 그에겐 증오스럽고 뒤집어엎어야 마땅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재판의 전통을 깨고 알아서 의자에 착석했다.
“그럴싸한 동의서에 속은 인간들이 내놓은 요소들이 온갖 차갑고 과학적인 방법을 거쳐 샬레에 아무렇게나 모인 게 첫 번째 시작이었다.”
법정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말이었다. 빈손으로 들어온 판사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 주제넘은 유리 접시들이 46개라는 숫자를 달성해 일렬로 놓이고, 동시에 8개의 약물을 튜브로 주입할 수 있는 캡슐이 만들어지면서 어떤 종의 탄생과 멸망이 동시에 발목을 풀었지. 지금 너희들이 불편함에 떨고 있는 손과 똑같은 모양을 한 가락들이 접붙인 세포들은 배양기 속으로 들어가 창조자들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을 먹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깨어나서 인간의 위대함도 아닌 자신이 실험체라는 사실부터 깨달았다.”
이곳에 법을 약간이나마 공부한 사람은 판사와 서기, 엉겁결에 불려온 옷깃 비뚤어진 검사 정도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 성능의 발명품 자리를 두고 법전이 강화인간을 멋지게 격퇴시키는 걸 보러 온 정치인들이 반이고 강화인간이 가는 곳을 자연스레 뒤따르는 연구원들과 기자들이 나머지였다. 곧 유래 없이 길고 끔찍한 아이덴티티를 읊는 증인을 막을 배짱과 명분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동족들을 향해 너희는 구원 받을 길 없는 실험체라고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칸 누니엔 싱이다.”
오필리아에게도 들어본 적 없던 괴이한 이름이었다. 적정한 거리에서 증인석을 바라볼 수 있는 좌석에 앉은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미간을 좁혔다. 칸은 비틀린 시선으로 캐서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잠시 후 판사가 간신히 껄끄러운 침묵을 깼다.
“…큼큼, 검사는 질문을 시작하시오.”
질문지를 손에 든 검사가 뚝뚝 끊어지는 동작으로 허리를 폈다. 칸은 웃었다.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작은 끈들은 고통스러운 신음 대신 미소를 내뱉게 했다.
진화전쟁의 전범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
다음 제시되는 자료들은 약 2세기 전, 센티넬 재판에 참석했던 서기가 법정에서 이루어졌던 질답을 기록한 것이다. 골턴 연구소가 있던 자리에 새워진 기념관에 공개가 되어 있는 사료이나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 여기에도 옮겨온다. 질문을 하는 이는 검사이고 대답하는 자가 칸이며, 이름을 따로 표시하지 않고 Q와 A로 각 인물들의 발언을 구별했다. 본 자료는 1차 공판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만 수록하고 있다.
Q : 인간을 상대로 그토록 잔인한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
A : 그 잔인하다는 표현은 나와 동족들이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한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외에 우리가 죽였던 다른 인간들까지 포함하여 비롯된 말인가?
Q : 당연히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표현이다.
A : 그렇다면 나는 먼저 첫 번째 경우를 반박하겠다. 적어도 우리는 연구원들과 비교당하면서 잔인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은 인간들의 발전을 위하여 또 다른 인간을 만들어 놓고 후자에게 어떠한 도덕의식도 찾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보다 더 문제되는 것은 쥐들에게도 해당되는 실험 후 해독 작용과 같은 후처리를 우리에겐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다는 거다.
Q : 자세히 말해보라.
A : 온갖 약물과 물리적 충격으로 실험체가 지칠 때까지 연구원들은 치유력을 시험해본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보통 인간에게는 수혈할 수도 없는 피를 다량으로 뽑으며 우리들의 상태를 관망하기도 했으며, 잘린 신경이 스스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강제적으로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 뒤 우리들이 능력껏 생명 활동을 지속하길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 사람을 죽여 놓고 알아서 살아나는지 아닌 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심정지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것을 안 겪은 동족이 없었다. 그리고 실험이 끝나면 우리는 1인실에 던져졌다.
Q : 무슨 뜻인가?
A : 인큐베이터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 나와 동족들은 셀 수도 없는 실험들을 거쳤으나, 이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안정제와 수면제였다. 우리는 인간보다 여러 면모에서 우월하나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상식 밖의 행위들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심정지 실험을 겪고 나서는 동족들이 몇 번씩 경련과 폭주 상태에 빠졌다. 아마 캐서린이 오필리아로부터 연구소 안에 있었던 일을 많이 전해 들어 알고 있을 거다.
Q : 캐서린이라 함은 캐서린 헤이스팅스를 뜻하나?
A : 그렇다. 그리고 오필리아 밀레이스는 나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Q : 골턴 연구소에 있었던 다른 직원들이나 박사들의 이름도 알고 있나? 그곳에서 사망한 피해자들을 확인하고 싶다.
A : 모른다. 내가 밀레이스를 기억하는 건 그녀가 유일하게 실험체들의 상태를 진정시키려 애썼기 때문이다.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Q : 두 번째 경우에 대해 설명을 계속해보라.
A : 아주 일부만을 밝혔으나 이 정도면 우리들이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들은 점차 약물로도, 각자의 이성으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인간은 우리들을 세상 밖으로 내놓고 방치한 무책임한 족속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인간이 갚았을 뿐이다. 다만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잔인하단 표현을 인정할 수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에서 발생한 복수는 파괴적이고 잔인할 수밖에 없다.
Q : 결국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당신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인간에 대한 복수란 뜻인가?
A : 그렇다.
⁂
검사는 한 장뿐이라 종종 팔락거리는 종이를 들고 심문을 이어가야 할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판사는 오늘 재판을 마무리 짓기는커녕 당장 휴정을 원하는 표정이었고, 정치인들은 눈짓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칸이 극적 효과를 노리듯이 사슬을 차르륵 끌어당겼다.
검사는 자신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캐서린의 눈빛을 읽으려 했다. 캐서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구겨진 바짓단이 검사가 있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자세를 고친 검사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을 꺼냈다.
“갑자기 공세를 멈췄던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단박에 이해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검사가 대표로 물었다.
“살기 위해서라니?”
“너희들도 매고 있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 있으면 잠시 그것을 내려놓거나 누군가와 함께 나눠 들지 않는가. 우리들의 고통은 온 몸이 부서질 듯 심했다. 휴전기 동안 우리는 그것을 분배하는 법을 배웠다.”
캐서린은 반사적으로 칸의 표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녀는 아직 강화인간을 연구하던 직책을 내버리지 못했다. 어쩐 일로 칸은 캐서린의 반응을 지나쳐버렸다.
“그 분배라는 것이 결국 고통을 쌓아둘 제단을 세우는 일에 그쳤다 해도.”
그 말로 대신 칸은 다른 연구원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