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STID/존본즈] Oblivion (Printed Version)

Jade E. Sauniere 2013. 12. 30. 21:18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Oblivion

(Printed Edition)

 

 

 

  그는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서도 그 24시간 안에 나를 꿰뚫는다.

 

  온갖 구속구와 유리관, 불길한 욕망처럼 움트는 가스등과 새파란 불빛에 휩싸여 있는 그는 마치 동화 속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지의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금발을 휘날리는 공주처럼 구조되지 못할 것이다. 가장 믿음직한 구원자인 그 자신이 혼자서는 그 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며, 나는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날개처럼 꽂힌 튜브들이 버튼을 한 번 누르는 동작에 곧바로 그의 생명을 빼냈다. 주변의 파란 불빛에 물들었지만 피는 여전히 붉다. 

 

  그는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 굳이 표정을 숨기려 애쓰지 않는다. 그가 24시간 만에 나를 꿰뚫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게서 나를 숨기는 것을 포기했다. 족쇄처럼 그의 피가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불빛을 거의 하늘색으로 탈색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본래 투명한 그의 눈동자는 그래서 꼭 거울 같다. 한 치도 다르지 않게 나를 그 곳에 담고, 내가 언제나 닿고자 하는 심연을 일깨운다. 

 

  나는 그의 피를 가지는 대신에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건넨다. 불공평한 거래라는 건 물론 알고 있다. 그의 피는 온갖 분야에 이용될 수 있는 반면에 내 눈물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안타까운 눈길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가 묻는다. 나를 동정하나? 

 

  이 말을 들으면 나는 그가 기억하지 못해도, 늘 그랬듯 고개를 저어준다. 나는 행동을 반복하지만 절대로 그를 놀리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러면 수십 번의 망각 속에서도 불씨를 잃지 않는 그의 날카로움이 말을 정정한다. 

 

  나를 사랑하나?  매번 듣는 말인데도 여전히 내 진심과 현실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찾지 못해 그 말은 넘겨야만 했다. 고개는 한 번 내저은 걸로 끝이다. 이제는 나의 눈동자가 대답할 차례다. 침묵이나 미동도 하나의 응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는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해라.

 

  행성 몇 개를 동시에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남자가 여기에 묶여 있으면서 발휘하는 가장 놀라운 점이란 도무지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로 죽었다가 깨어나는 그의 머리는 컴퓨터와 다르지 않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돌아가는 지점은 언제나 한 곳이다. 나는 오늘로써 50번도 더 들었을 그의 문장을 다시 경청했다. 

 

  여전히 인간과 연방을 증오하며, 무엇보다 너를 증오하며, 너희들의 불행에 책임이 있으나 그것보다 나의 고통을 우선하는 내 일면까지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에겐 언제나 처음이고 나에겐 50번의 횟수를 넘긴 말 뒤에 나는 보통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인간이 억지로 묶어둔 신물(神物)처럼 묶여 있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그가 이기적인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는 역할은 매번 나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나를 향한다는 그의 증오 또한 정당하다. 그 모든 것을 안고 내가 다소 씁쓸하게 웃으면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반복적으로 그가 뒷말을 이어 주길 상상했다. 

 

  “나를 동정하나?”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이즈음에 지어야 하는 표정을 내보인 모양이었다. 튜브를 돌고 돌아 여러 개의 시험관에 나눠 담긴 그의 피를 하나씩 모았다. 

 

  “아니.”

 

  그에게 육성을 섞어 대답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마침 시험관들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굳이 뒤를 돌아서 눈빛을 전하는 일은 부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50번을 넘게 거쳤던 망각의 상황에서 처음으로 발현되는 차이점이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를 사랑하나?”

 

  결국 돌아오는 지점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대한 명제는 한낱 내 목소리가 이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가 감히 나를 향하여 그 아름다운 단어를 소리 내 준다는 사실도 좌절감에 자리를 뺏겼다. 나는 그의 피를 정렬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인간들에게 그것은 생명수의 진액과도 같은 귀중한 물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망각의 반복 속에서 당신이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말해줬다면. 이를테면….

 

  내 모습이 가진 모든 무게를 견딜 수 있다면, 부디 나를 사랑해 다오, 라고.

 

  “왜 하필 그걸 사랑이라고 말해?”

 

  내가 내뱉는 말이 앞뒤 없이 맺어진 띠를 가르는 작은 균열이 되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사지가 고정된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망각에 물들지 않는 냉혹한 이성을 목격했다.  

 

  그는 나의 사랑을 읽어내지만 그것을 연장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사랑이 보이므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이제 그것을 힐난하거나 비웃지도 않았다. 한편 나는 그의 거절을 학습하면서도 그것을 전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말없이 자신의 피를 가지고 돌아서는 등을 말라붙은 안구가 추적했다. 가스등이 타오르는 소리, 튜브를 순환하는 액체가 작게 보글거리는 소리, 그것들이 내는 음파 하나하나가 나를 거세게 찔렀다.  

 

  “있다가 만나.”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 독립된 문장들의 나열이 감옥과도 같은 연구실을 뱅뱅 돌았다. 발을 옮기면서 나는 유리 장막을 내렸다. 공간을 가른 그것은 곧바로 검게 물들어 그의 전부를 가려버렸다. 

 

  칸이 오늘을 잊기까지 앞으로 18시간이 남았다.

 

 

 

* * *

 

 

 

  여기저기서 조작된 인간의 피가 내려주는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덕택에 칸은 많은 양을 채혈당해야 했고 정상적인 수치를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24시간의 일부가 잠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유령처럼 창백해진 얼굴 위에서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눈을 마주하기도, 그렇다고 그가 가슴 아프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기에도 자신이 없어 채혈 이후에는 되도록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대개 그는 첫 번째 수면으로 3시간에서 4시간을 소모했다.

 

  앞에서 내가 강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칸의 혈액은 꼼꼼한 검사 과정을 거쳐 극소량만 외부로 배포되었다. 주로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우주선이나 타 행성에 파견을 간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 들었다. 벌칸이 알려준 사실이니 틀림없으리라. 다만 분리 및 정제 작업을 몇 번이고 거치면 아무리 넉넉하게 피를 뽑아도 남는 게 많지 않아질 뿐이었다.

 

  이제는 손에 익은 수준이라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을 다 해 놓은 뒤였다. 기계가 조작해 놓은 대로 칸의 혈액을 굳히고 모양을 만드는 단계만 남았다. 10분만 지나면 세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오늘 그가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위험한 모험은 아니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장막을 치우고 침상처럼 가로로 평평해진 기구를 보았다.

 

  튜브 안이 투명해서 누군가는 아무런 약물도 투여되고 있지 않으니 튜브를 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튜브 안에는 거의 쉬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약물이 흘렀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서 칸에게는 적정량의 영양제가 주입되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어 그의 근육을 풀어주는 약물도 들어갔다. 혹시나 그가 악력을 폭발시켜 탈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확신하건대 그가 300년 전쯤에 겪었을 여러 가지 실험과 지금의 사태를 견주어도 후자가 그렇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빛 가스등이 반짝거리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실패하고 겨우 다리만 바닥에 붙여 놓았다. 언젠가는 24시간이 다 지나가버려서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쓸리고 또 다시 그가 나에게 변함없는 증오와 경멸을 뱉어낼 것을 알고 있었다. 망각하는 자는 망각을 몰라서 자신이 얼마나 남을 눈물짓게 하는지 모른다.

 

  벌써부터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을 조목조목 짚으며 나의 행위와 자신의 화를 평행선상에 올려놓으려는 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내 목소리로 대항했다.

 

  “그냥 나는 당신이 계속해서 어제를 잊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것만 알면 되지 않을까.”

 

  가스등의 기둥에 기대어서 나는 혼잣말을 흩뿌렸다. 아무리 날 선 말도 50번을 들으면 그 감각이 없다. 칸이 반복하는 언어들이 그랬다. 망각에 패배한 강화인간의 창조성을 비난하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10분이 다 지난 것 같았다. 칸이 눈을 떴다.

 

  사실 시계가 없어서 15분이 흘렀는지 20분이 흘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내 말을 들었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싶었다. 그는 어차피 잊고 만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었는지도 몰랐다.





2월 월드피스에 나오는 존본즈 회지 <존재와 존재함을 위한 산문> 중에서.